유익한 정보

[스크랩] 조선시대 최대의 갑부는 ?

양곡(陽谷) 2008. 2. 1. 09:16
 
 복사
 

연암 박지원의 「허생전」에서 거지 행색의 허생에게 선뜻 만 냥을 꿔준 변씨는 역관 출신으로 조선 제일의 부자가 된 실존인물이었다.

 

 

허생은 돈을 벌어오라는 부인의 성화에 못 이겨 도성 제일의 갑부 변씨를 찾아간다.

 

내가 집이 가난하나 무얼 좀 해보려고 하니, 만 냥을 꾸어주시기 바랍니다.”

 

변씨는

 

그러지요

 

라고 허락하고 그 자리에서 만 냥을 내주었다. 허생은 감사의 인사도 없이 가버렸다. 변씨 집 자제와 빈객들이 허생을 보니 거지였다. 실띠의 술이 빠져 너덜너덜하고, 갖신의 뒷굽이 자빠졌으며, 쭈구러진 갓에 허름한 도포를 걸쳤는데, 코에서 흰 콧물이 흘렀다. 허생이 가자 모두 크게 놀라 물었다.

 

대인께서는 저 사람을 아십니까?”

 

모른다

 

지금 하루아침에, 평생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만 냥을 그냥 주면서 성명도 묻지 않으시다니, 무슨 까닭입니까?”

 

변씨가 대답했다

 

이건 너희들이 알 수 없는 일이다. 무릇 남에게 빌리러 오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뜻을 크게 선전하고 신의가 있음을 자랑하지만 얼굴빛은 비굴하고 말은 중언부언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저 객은 옷은 남루하지만 말은 간단하고 눈은 오만하며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이 없으니, 재물이 없어도 자족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하려고 하는 바가 작지 않을 것이고 나 또한 그를 시험해보는 것이다. 안 줄 것이면 모르지만 기왕에 만 냥을 줄 바에야 성명은 물어서 무엇하겠느냐

 

「열하일기」 「옥갑야화」

 

 

「허생전」에서 가난뱅이 허생에게 선뜻 만 냥을 빌려주었던 변 부자의 직업은 역관이었다. 변 부자의 손자인 숙종 시대 역관 변승업은 지금으로 말하면 천 억 이상의 재물을 가진 부자였다. 그리고 부인이 죽었을 때 감히 왕가의 상제를 행하여 물의를 빚기도 했던 인물이다. 엄격한 신분사회인 조선시대에 중인이 양반처럼 선산을 구축한 것은 당시 변승업 집안의 위세를 능히 짐작케 한다. 또한 그의 9형제 중 6명이 역관이었다. 뿐만 아니라 역관 신분을 대대손손 이어가 280년간 106명의 역관을 배출했다.
 

역관을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기관은 사역원이었는데 이 곳은 역관의 추천을 받아 심사를 통과한 사람만이 입학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현직 역관들이 직접 이들을 심사했다. 이렇듯 천거받기도 어렵고 천거됐다 하더라도 누가 추천을 했느냐에 따라 합격에 상당한 영향이 있었으니 역관은 당연히 세습될 수밖에 없었다.

 

 

 

세계 최초의 중국어 학습서를 저술한 사람은 조선의 역관이다.

 

역관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역관이 공식 직제로 사료에 등장한 것은 고려 충렬왕 2년(1276)으로, 이때 통문관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당시에는 원이 집권하고 있었으므로 몽고어 역관이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라가 몰락하면 그 언어도 쇠락하기 마련, 명이 원을 대체하면서 몽고어 역관도 몰락했다. 이후 조선이 점점 자리를 잡아가면서 주변국들과의 외교가 빈번해지고 교류하는 국가도 늘어났다.

 

그리하여 중국어, 몽고어, 만주어, 일어, 위구르어, 유구어 등 6개국 언어를 구사하는 역관을 양성했다. 이들 여러 언어들을 체계적으로 교육하기 위해 제작된 외국어 교재로는 현존하는 최고의 중국어 학습서인 『노걸대』와 『박통사』가, 일본어 교재로는 『첩해신어』가 있었다. 이들 교재는 해당 외국어를 교육시키기 위한 필요에서 역관이 직접 집필했다.

 

 

 

역관들은 요즘으로 치면 ‘투잡스족’으로 외교관이자 국제무역상이었다.


조선 초기에 역관은 통역과 실무만을 맡은 게 아니라 직접 사은사라는 공식 외교관 신분으로 중국을 왕래할 정도로 고위직에 오르기도 했는데, 예종 이후로 사대부들의 견제가 심해지면서 점점 본연의 통역 임무만을 수행하게 되었다.

 

 


국제무역에서는 조선의 귀한 약재였던 인삼을 중국이나 일본에 판매하여 거액의 돈을 벌기도 했다. 또, 중국과는 다음과 같은 다채로운 무역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조선의 지정학적 위치에 기반한 중개무역을 통해 얻은 이익이 가장 컸다. 이 중개무역은 청나라의 해금정책으로 중국이 일본과 직접 교역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고 이 중개무역에서 가장 큰 이익을 본 것은 조선의 역관이었다.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로 여겨지는 조공이 실제로는 조선의 잇속을 챙기는 국제무역이었다.


중국에 바치던 조공은, 중국에서 한 해에 한 번만 오라고 했는데도 조선에서 억지로 우겨서 세 번이나 갔을 정도로 실제로는 조선이 몇 배나 이익을 보는 무역이었다. 조선의 기본 외교정책에 따라 중국에 대하여 사대를 하였지만 실질적인 내용에서는 조선 경제에 도움을 주는 무역행위였던 셈이다. 중국과 일본의 중간에 위치한 조선은 중개무역을 하기에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었고 역관은 이런 조선의 입지를 최대한 이용하여 자신도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을 뿐 아니라 조선경제까지도 크게 활성화시켰다. 정부는 명분만 앞세우는 사대부들의 등살에 견디지 못하고 역관의 이러한 무역행위를 수시로 금하였지만 이 무역행위로 왕실과 사대부도 큰 이익을 보았으므로 근절시키지는 못했다. 시장의 승리였다.

 

 

 

은행이 무역업체에 자금을 대출해주고 이익을 얻는 것처럼 조선 관아들은 앞 다투어 역관에게 대량의 은을 빌려줌으로써 재정 확충을 도모하였다.


역관들이 조선 제일의 갑부가 될 수 있었던 요인 가운데 하나는 관아의 은을 사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역관은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하여 각 관아에서 필요로 하는 중국 물품이 있을 경우, 대금을 받아서 구입하여 관아에 가져다주고 몇 배의 이익을 얻었다. 그리고 역관의 신분을 빌미로 관아의 은을 빌려 쓸 수 있었다. 이는 관아에서 역관에게 은을 빌려주면 관아도 큰 이익을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역관은 외교 사행길에 소요되는 모든 경비도 자신이 부담했다. 역관 신분을 이용하여 거둔 막대한 부에 비하자면 외교경비쯤은 큰 부담이 되지 않았다.

 

 

 

명나라 홍등가에서 기녀를 구출해주고 뒤에 보답받은 이야기의 주인공은 <상도>의 임상옥이 아니라 역관 홍순언이었다.

 

홍순언은 조선의 역관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겼던 역관으로, 역관으로는 드물게 당릉군(唐陵君)으로까지 봉해진 특이한 인물이었다. 그가 그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까닭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종계변무’ 즉, 명나라의 『대명회전』에 잘못 기록된 태조 이성계의 족보를 바로잡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에 군사를 보내주도록 한 것이다.


일개 역관이 대신들도 하지 못하는 이런 일을 해낼 수 있었던 데는 재미난 이야기가 숨어 있다. 홍순언이 명나라에 갔을 때 하루는 홍등가에 갔다. 그는 그곳에서 억울한 사정으로 몸을 팔아야 했던 중국 여인을 큰돈을 주고 구해주었는데 그녀가 뒤에 명나라의 재상 석성의 부인이 되었다. 부인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난 석성이 크게 감동하여 홍순언의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 성심껏 도와주었고, 종계변무와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에 도움을 줄 수 있게 된 것도 석성이 애썼기 때문에 가능했다. <상도>에서는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이 임상옥으로 표현되었지만 실제 주인공은 역관 홍순언이다. 이 내용은 『통문관지』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뛰어난 외국어 실력과 대외정보 수집능력으로 역관은 화약을 밀수입하거나 직접 제조하여 조선군의 전투력 향상에 기여하기도 했다. 역관 오경석은 병인양요 때 뛰어난 첩보활동으로 프랑스의 막강한 함대에 맞선 조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역관들은 때로 상대국의 정보를 빼오거나 반출 금지된 무기나 원료를 구입해오는 첩보원 역할도 했다. 이를테면 조선 후기 가장 민감한 교역품이었던 화약의 원료인 염초와 유황의 경우, 구입이나 제조 비법 취득이 매우 중대한 일이어서 절대적인 비밀엄수가 요구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역관의 임무가 되었다. 역관 표헌, 김지남 등의 노력으로 조선은 자체적으로 화약을 만들고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군의 전투력을 대폭 높였다. 역관 김지남은 그의 부친과 함께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하여 청의 땅이 될 뻔했던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우는 쾌거를 달성하기도 했다. 또한 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동양함대를 앞세워 조선을 침략했을 때, 역관 오경석은 평소 자신이 알던 중국인 관리들을 동원, 프랑스군의 정보를 빼내어, 이 정보를 조선군에 전달함으로써 조선이 막강한 프랑스 함대를 대패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대대로 유명한 역관을 배출한 집안의 서녀 장희빈은 서인정권을 무너뜨리고 남인들의 재집권한 기사환국의 주역이었으며, 장씨 집안은 남인정권과의 ‘정경유착’으로 큰 권세를 누렸다.


조선 후기의 역관 명가인 세 가문이 있다. 밀양 변씨, 우봉 김씨, 인동 장씨가 그들이다. 이중에서도 인동 장씨는 역관의 틀을 뛰어넘어 한때 정치 명가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장희빈은 숙종 당시 거부였던 역관 장현의 종질녀로서 천인으로 인생을 보내느니 남다른 자색으로 인생역전을 꿈꾸고 궁녀 입궁을 자처하였다. 그녀가 서인정권을 무너뜨리고 남인정권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 자신의 뛰어난 전략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녀의 배경이었던 인동 장씨 가문, 즉 역관 명가가 정치권력을 획득하고자 그녀를 지원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역관은 천주교 서적과 새로운 서양선진문물을 조선에 들여옴으로써 개화사상의 주역이 되었고, 이는 한말애국운동으로 이어졌다. 역관은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앞선 시대감각으로 조선사회의 변화를 촉진하였다.

 

 


교통이 발달되지 않았고 국제여행이 힘들었던 이 시대에 역관은 변화하는 세계를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천주교서적과 많은 신문물들이 역관을 통해서 조선에 전해졌다. 역관들은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는 선구자 역할을 하며 조선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을 누구보다 먼저 깨우쳤다. 이들은 신분철폐운동, 개화사상을 싹 틔웠고 급변하는 조선 후기에 새로운 세계를 향해 눈을 떠가는 핵심 세력으로 떠올랐다. 조선 개화사상의 세 주창자는 양반 출신의 박규수와 중인 출신인 오경석, 유홍기였다. 이들 가운데서도 역관 오경석은 박지원의 조부 박제가와 추사 김정희의 제자였던 역관 이상적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일찍이 깨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오경석은 중국에 자주 드나들면서 양무운동을 했던 중국인들과 교제하면서 조선의 앞길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고민했다.


오경석은 청나라의 당면 위기가 조선에도 미구에 닥칠 문제임을 직시하고 미리 그 대응책을 세워놓지 않으면 큰 위기에 처하리라고 예상했다. 그는 시대에 뒤떨어진 성리학에 젖어 있는 조선의 지배층을 일깨우기 위해 스스로 변화한 세계상을 담고 있는 서적들을 읽고 새로운 이론을 습득하는 한편 이를 조선으로 반입해 양반 사대부들에게 읽히려고 했다. 이런 과정에서 조선의 개화파가 탄생할 수 있었다. 그는 『해국도지』『영환지략』『박물신편』등의 지리서, 서양과학서 등과 태평천국운동에 관한 서적, 유럽여행기 등 많은 서적을 들여옴으로써 조선의 개화에 앞장섰다. 또한 일제 치하 역관 가문 출신들은 자신이 축적한 거대한 부를 자본으로 독립협회에 참여했고, 3·1운동에도 주도적으로 개입하였으며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영향력 있는 직책을 맡기도 했다.

출처 : 조선시대 최대의 갑부는 ?
글쓴이 : 국화옆에서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