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의 인생은 늘 출발을 좋아한다.
“가자.
더 멀리. 더 높이.”
그러나 인생의 후반부에 들어서면 마음속에 이상한 단어 하나가 자라난다. 돌아가고 싶다.
젊을 때는 여행을 떠나는 것이 좋지만, 나이가 들면 여행에서 돌아오는 날이 더 좋다.
젊어서는 호텔이 좋고
노년에는 내 침대가 최고급 호텔이다.
젊어서는 늦게까지 밖에 있어도 좋지만, 나이가 들면 저녁만 되면 마음이 말한다.
“이제 집에 가자.”
몸이 먼저 인생의 철학을 깨닫는 것이다.
오디세우스의 이타카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
는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런데 집에 돌아가는 데 무려 십 년이 걸렸다.
요즘이라면 내비게이션이
“목적지까지
3일 4시간입니다.”
했을 텐데,
당시는 GPS도 없었고
무엇보다 신들이 내비게이션을 꺼버렸다.
키클롭스를 만나고,
세이렌의 노래를 듣고,
칼립소의 섬에 붙잡히고,
수많은 풍랑을 만났다.
그렇게 세상을 떠돌면서도 그의 마음속에는 한 이름이 남아 있었다.
♡이타카.
사람은 멀리 떠나보아야 비로소 자기가 정말 돌아가고 싶은 곳을 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다.
젊을 때는 세상을 정복하려 하지만, 노년이 되면 세상이 나를 정복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무릎이 먼저 항복하고,
허리가 협상을 요구하고,
눈은 작은 글씨를 거부하고,
기억력은 안경을 어디에 두었는지부터 잊어버린다.
그제야 깨닫는다.
인생은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는 것이었구나.
‘죽었다’와 ‘돌아가셨다’
우리말에는 참 묘하고 아름다운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우리는 “죽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돌아가셨다”고도 말하기도,
왜 하필 돌아갔다고 할까.
돌아간다는 것은 본래 있던 곳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죽었다’에는 끝이라는 느낌이 있지만 ‘돌아갔다’에는 길이 있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어딘가로 돌아간 것이다.
그 한마디 속에는 인간이 오래 품어온 소망이 들어 있습니다.
죽음이 소멸이 아니라 귀환이기를 바라는 마음.
천상병의 "귀천"
이 지점에서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상병은 죽음을 어둡고 두려운 끝으로만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삶을 한바탕 소풍처럼 바라보았고, 마지막에는 하늘로 돌아간다는 마음을 노래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얼마나 담담하고 아름다운 말인가.
죽음을 ‘죽음’이라고 부르지 않고
귀천(歸天), 하늘로 돌아가는 일이라고 부른다.
오디세우스에게 돌아갈 곳이 이타카였다면,
천상병에게 돌아갈 곳은 하늘이었다.
그리고 신앙인에게 그 하늘은
막연한 공간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 하느님의 품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인생이라는 긴 여행의 의미가 조금 달라진다.
우리는 세상에 버려진 존재가 아니라
본향을 향해 가는 나그네다.
코헬렛의 허무와 귀천
코헬렛은 말합니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젊을 때는 이 말이 허무하게 들린다.
그러나 노년에 읽으면 오히려 지혜롭게 들립니다.
코헬렛이 말하는 허무는
“아무것도 의미 없다”는 뜻이 아니라,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한 것처럼 붙들지 말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돈도 지나가고,
명예도 지나가고,
권력도 지나가고,
젊음도 지나갑니다.
결국 우리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인생의 지혜는 더 많이 움켜쥐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잘 내려놓는 데 있는지도 모릅니다.
김승옥의 부끄러움,
윤동주의 부끄러움
김승옥의 "무진기행"
마지막에 남는 것은 자기 자신을 향한 부끄러움이다.
윤동주의 "서시" 역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꿈꾼다.
젊을 때의 부끄러움은 남에게 들키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노년의 부끄러움은 다릅니다.
내가 나 자신에게 부끄러운 것입니다.
조금 더 사랑할 수 있었는데
사랑하지 못한 것.
조금 더 용서할 수 있었는데
용서하지 못한 것.
감사해야 할 때
불평했던 것.
소중한 사람보다
소중하지 않은 것을 더 붙잡았던 것.
돌아보면 인생에서
정말 아쉬운 것은..
“그때 좀 더 사랑할 걸.”
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노년은 ‘귀환을
준비하는 계절’이고,
노년은 단순히 늙어가는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삶의 짐을 하나씩 내려놓으며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연습을 하는 시간입니다.
욕심을 내려놓고,
자존심을 내려놓고,
미움을 내려놓고,
쓸데없는 경쟁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조금씩 가벼워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인생의 마지막 여행에는
많은 짐이 필요하지 않다.
빈손으로 왔으니 빈손으로
돌아가면 된다.
다만 한 가지는 가져가고 싶다.
사랑했던 기억. 그리고
그 사랑보다 더 큰 하느님의 은혜!!
‘귀천’은 죽음의 다른 이름이다.
천상병의 시가 아름다운 까닭은
죽음을 미화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삶을 충분히 살았기에 죽음을 귀환으로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풍을 마치면 집으로 돌아간다.
긴 여행을 마치면 고향으로 돌아간다.
하루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인생이라는 긴 여행이 끝나면..
우리는 본향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삶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이 향하고 있던 마지막 방향인지도 모릅니다.
아버지의 집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 아버지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요한 14,2)
아버지 집.
이보다 따뜻한 귀환의 언어가 있을까?
어머니의 품에서 시작된 인생이
마침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간다.
이 땅에서 잠시 머물다가 다시 영원한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단순한 소멸이 아니다.
귀천이라는 생각이..
하늘로 돌아가는 것이며,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천천히 걷자.
젊은 날에는 물었다.
“얼마나 멀리 갈 것인가?”
중년에는 물었다.
“무엇을 이룰 것인가?”
노년에는 묻게 된다.
“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오디세우스에게는 이타카가 있었다.
천상병에게는 하늘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아버지의 집이 있습니다.
길가의 꽃도 보고,
가을 하늘도 보고,
지나온 세월도 한 번 돌아보자.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 있으니까.
그리고 마지막 날,
누군가가 묻는다면,
“어디 가십니까?”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죽으러 가는 것이 아닙니다.
돌아가는 중입니다.”
오디세우스가 이타카로 돌아가듯,
천상병 시인이 노래한 하늘로 돌아가듯,
나는 나를 부르시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긴 소풍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歸天 — 귀천.
돌아감은 끝이 아니라
마침내 집에 도착하는 일임을,
인생은 떠남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돌아감으로 완성된다.
Life begins with departure, but it is fulfilled in returning home.
ㆍ
ㆍ
본향으로 가는 길목에 서니
지나온 길이 새삼 눈에 들어 옵니다.
지나가는 바람에도 감사하고
곁에 있는 손길에도 감사하면서
오늘 하루를 선물처럼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언젠가 본향에 이르는 날,
참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도록..
그 길목에서
지금도 천천히 삶을 배워가며
천상을 향해 한 걸음씩..
소망을 가지고..
발걸음을 내딛어 봅니다.**
(받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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