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공부

일타강사 전한길

양곡(陽谷) 2024. 11. 3. 17:55

《 용서(forgiveness) 》

ㅡ씨 에스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에서

기독교 덕목 가운데 가장 인기 없는 것이 '순결'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 말이 옳았는지 모르겠군요. 제 생각에 그보다 더 인기 없는 덕목이 있으니 말입니다.

그것은 기독교 규범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22:39)는 말로 규정되어 있는 "사랑의 덕목"입니다. 기독교 도덕에서 '네 이웃'에는 '네 원수'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원수를 용서해야 하는 끔찍한 의무에 부닥치게 됩니다.

누구나 용서란 훌륭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이번 전쟁(양차 세계대전) 때처럼 실제로 용서해야 할 일이 생기기 전까지는 말이지요. 그러나 정작 용서가 필요한 상황이 되면 용서라는 말만 꺼내도 화가 나서 으르렁거리게 마련입니다.

용서란 너무나 지키기 힘든 고차원적인 미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나 하기 싫은 창피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용서하라는 소리는 이제 지긋지긋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중에서도 절반은 제게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당신이 폴란드인이나 유대인이라면 과연 게슈타포를 용서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겠소?"
저도 그런 마음이 들지 알고 싶습니다. 정말이지 알고 싶습니다. 고문을 당해 죽게 되더라도 목숨 때문에 신앙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들을 때마다 내가 정말 그런 상황에서도 신앙을 부인하지 않을지 알고 싶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책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ㅡ사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너무나 적습니다ㅡ기독교가 어떤 것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어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한복판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말씀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 말씀은 다른 방법으로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할 여지를 조금도 주지 않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은 아주 명백한 사실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어찌 되었든 용서는 아주 어려운 일이지만, 이 일을 좀더 수월하게 만들 방법을 두 가지 정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수학을 배울 때 미적분부터 시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간단한 덧셈부터 시작하지요. 마찬가지로 용서하는 법을 정말 배우고 싶다면(모든 성패는 용서를 배우고 싶어하는 마음이 정말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나치 게슈타포보다는 좀더 쉬운 대상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즉, 남편이나 아내, 부모나 자녀, 또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지난주에 내게 잘못한 행동이나 말을 용서하는 일부터 시작하라는 것이지요. 당장은 이런 것만 용서해 주기에도 바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듯이 내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는 나 자신을 얼마나 한치 오차 없이 사랑하고 있습니까?
저 자신의 경우를 생각해 볼 때, 저는 자신에게 한치 오차 없는 호감이나 애정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저라는 사람은 제가 보기에도 늘상 어울리고 싶은 상대가 못 됩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 역시 '그
에게 호감을 느끼라든지' '그에게서 매력을 찾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진작 알았다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애를 쓴다고 해서 호감이 생기는 것은 확실히 아니지요.
제가 저 자신을 좋게 생각하거나 호감 주는 인간으로 생각하느냐구요? 글세요. 감히 그럴 때도 있긴 하지만(이런 생각은 필시 최악의 순간에 하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곧 저 자신을 사랑하는 이유는 아닙니다. 사실은 오히려 그 반대지요. 저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호감 주는 인간으로 여기는 것이지, 제가 원래 호감 주는 인간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네 원수를 사랑하라"(마 5: 44)는 말씀 또한 그들을 호감주는 인간으로 생각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점은 우리를 크게 안심시켜 줍니다. "원수를 용서하라"는 말씀을, 실제로는 악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을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여기라는 말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꽤 많지요.

한 걸음 더 나아가 봅시다. 제 모습을 가장 선명하게 보는 순간 저는 제가 호감 주는 인간은커녕 오히려 아주 추(醜)한 인간임을 알게 됩니다.
제가 저지른 어떤 짓들은 그야말로 끔찍하고 혐오스럽게 보이기도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원수들이 저지른 어떤 짓들 또한 혐오하고 미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래 전에 기독교의 스승들이 사람의 악한 행위는 미워하되 그 사람 자체는 미워하지는 말라고 했던 말이 생각나는군요. 그들이 늘 말했듯이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저는 이런 구분이 너무 지나쳐서 우습기까지 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어떤 사람의 행위는 미워하면서 그 사람은 미워하지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몇 년 후, 제가 평생 동안 그렇게 대해 온 사람이 하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저 자신이었습니다.

저는 자신의 비겁함이나 자만심이나 탐욕은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계속 자신을 사랑해 왔습니다. 그것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제가 그런 것들을 미워한 이유는 바로 저 자신을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이 그런 짓을 저지르는 종류의 인간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토록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기독교는 잔인한 행동이나 배신 행위에 대한 미움을 티끝만큼이라도 줄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마땅히 그런 일을 미워해야 하며, 그런 일에 대해 나쁘다고 했던 말을 단 한마디도 철
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런 일을 미워할 때, 자기 자신에게서 똑같은 것을 발견했을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미워하라고 합니다. 즉, 그 사람이 왜 그런 짓을 저질러야 했을까 안타까워하면서, 할수만 있다면 언제 어디에서 어떤 식으로든 치유되어 그의 인간다움을 되찾기를 (중보기도로) 바라라는 것입니다.

*사탄교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종교이다*

과연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는지 시험해 볼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신문에 아주 흉악한 범죄 기사가 났다고 합시다. 그런데 다음 날, 전날의 보도 내용이 전부 사실은 아니라거나 그렇게까지 악한 범죄는 아니
라는 식으로 내용이 바뀌었다고 합시다.

그때 '정말 잘됐군. 그렇게까지나쁜 사람들은 아니라니 다행이야'라는 생각이 먼저 듭니까, 아니면 김이 샌다는 생각이 들거나 더 나아가 그 범죄자들을 정말 악한으로 취급하는 더없는 즐거움을 빼앗기고 싶지 않은 나머지 전날 실린 기사를 더 믿으려 합니까?
만약 두 번째 경우라면 종국에는 마귀가 되는 길에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
만, 이것은 검은 것이 좀더 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면, 나중에는 회색도 검게 보고 싶어 할 뿐 아니라 급기야는 흰색까지 검게 보고 싶어 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모든 것ㅡ 하나님과 친구들과 우리 자신까지 포함해서 어떻게든지 악하게 보려고 고집하게 될 것이며, 그 짓을 영영 그만두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순전한 증오의 세계에 영원히 갇혀 버리는 것이지요.

"보통 사람은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해서 그리 싫지 않는 그 무엇을 느낀다."
ㅡ라 로슈푸코

《사형제도 존속의 이유》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봅시다. 그렇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그의 잘못을 벌하지 말라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벌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음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살인을 저질렀을 때 기독교적으로 옳은 행동은 경찰에 자수해서 사형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판사가 사형을 구형하거나 그리스도인 병사가 적을 죽이는 것은 전적으로 옳은 일이라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도, 또 전쟁이 일어나기 훨씬 전에도 이렇게 생각해
왔으며, 평화가 찾아온 지금도 여전히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지니라"는 계명을 고려한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어에는 '죽이다'라는 단어와 '살인하다'라는 단어가 구분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이 계명을 세 번 인용하셨는데 그때마다 '살인하다'라는 단어를 쓰셨습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이 다 그렇
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히브리어 단어도 이와 똑같이 구분된다고 합니다. 성관계가 전부 간음이 아니듯이 사람을 죽이는 것 또한 전부 살인은 아닙니다. 군인들이 세례 요한을 찾아가 자신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을 때, 요한은 군대를 떠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가 로마 특무상사ㅡ당시 명칭대로라면 백부장'ㅡ를 만나셨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기사(騎士)ㅡ선한 대의를 수호하기 위해 무장한 그리스도인ㅡ정신은 위대한 기독교 정신 가운데 하나입니다.

전쟁은 무서운 일이며, 저는 제가 알고 있는 한 평화주의자를 존경합니다. 비록 그의 생각은 전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만 말입니다.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최근에 나타난 일종의 반평화주의(반전사상)로서, 이것은 싸우긴 싸우되 부끄러운 일을 하듯 침울하게 싸워야 한다는 느낌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느낌은 군복무중인 훌륭한 그리스도인 청년들 중 많은 이들의 권리, 즉 용기에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마련인 일종의 쾌활함과 전념의 정신을 빼앗아가 버립니다.

저는 제1차 세계대전 참전 당시 저와 독일군 젊은이가 동시에 서로를 죽이고 나서 그 다음 순간에 천국에서 다시 만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가끔 생각해 보곤 합니다. 아마 두 사람 모두 조금도 적의를 품거나 당황해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할 것입니다. "원수의 행동을 정죄하고 그에게 벌을 주며 죽일 수도 있다면, 그리스도인의 도덕과 보통 관점의 차이는 무어란 말인가?
거기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이 영원히 살 것을 믿는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의 중심, 즉 영혼의 내부를 천국의 피조물로 만들 수도 있고 지옥의 피조물로 만들 수도 있는 그 작은 흔적이나 꼬인 자국입니다. 따라서 전쟁이나 사형처럼 불가피한 경우 사람을 죽일 수는 있어도 미워하거나 미워하기를 즐겨서는 안 됩니다. 불가피한 경우 벌을 줄 수는 있어도 그것을 즐겨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안에 적의(敵意)나 복수심이 결코 자리잡지 못하도록 그런 마음을 없애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든지 결심만 하면 다시는 이런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제 말은 이런 마음이 고개를 쳐들 때마다 날마다, 해마다, 평생토록 그것을(미운감정을 회개하고) 쳐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시도할 수조차 없는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적을 죽이거나 벌해야 할 때라도 자기 자신에게 품는 마음을 그에게도 품도록ㅡ그가 나쁜 사람이 아니기를 바라며 이 세상에서든 다른 세상에서든 치유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품도록, 그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품도록 애써야 합니다. 이것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에 담긴 뜻입니다.

즉,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그에게 호감을 가지라거나 그가 근사한 사람이 아닌데도 근사한 사람이라고 말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잘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전혀 사랑할 만한 부분이 없는 사람들도 사랑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는 점은 저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신에게는 사랑할 만한 부분이 있어서 사랑합니까? 여러분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단지 그 대상이 여러분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모든 자아들을 이와 똑같은 이유로, 또한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보여 주시기 위해 우리 자신의 경우를 통해 쉽게 그 본보기를 얻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법칙을 다른 모든 자들에게도 계속해서 적용해야 합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신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마 적용이 더 쉬워질 것입니다. 그는 우리가 가졌다고 생각하는 근사하고 매력적인 자질들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가 자아라고 불리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사랑하십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그것 외에 사랑받을 만한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남 미워하기를 너무나 즐기는 나머지 그 죄를 버리는 일을 술이나 담배 끊는 일이나 매한가지로 여기는 우리 같은 피조물들에게는………….

"하나님은 조건 없는 십자가의 용서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경산출신 일타강사 전한길
https://youtu.be/CAVOdnrOSdA?si=QsQA62JZ9pDMjLX5

https://youtu.be/CAVOdnrOSdA?si=IyyFmFd6rSc7mCQ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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