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이라는 선물>
“지난달에 내가 무슨 걱정을 했었지?” “작년 이맘 때 고민거리는 무엇이었지? ”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의 기억이 도무지 나질 않는다. 우리 나이에 다행스럽게도 주어지는 ‘망각’이라는 선물 때문인 것 같다.
요즘은 특히 증세가 심해졌다. 부엌으로 물을 가지러 갔다가 내가 왜 부엌에 왔는지 한 참을 생각하는 일도 있다. 냉장고 문을 열고 과일을 꺼내러 갔다가 무얼 가지러 갔는지 생각이 안 나서 그냥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아내가 떠난 뒤로 이런 증세가 더 심해진 것 같다.
마침 몇 주 전에 보건소에서 치매 검증을 받으러 오라는 연락이 있었던 터라 어제는 출근 시간을 늦추고 먼저 보건소로 달려갔다. 약 5년 전부터 아내와 1년에 한 번씩 보건소에서 치매 검사를 받았었기에 곧바로 담당자를 찾아갔다. 전 후 사정을 이야기하고 검사를 받았다. 결과는 지난해와 같았다.
담당자는 왜 나 혼자 오셨느냐고 묻는다. 아내가 열흘 전에 소천해서 혼자 왔다고 했다. 담당자는 깜짝 놀라면서 괜한 것을 여쭈었다며 여간 미안해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괜찮다며 자꾸 하던 일을 잊는 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더니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다. 단순히 건망증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치매라는 판정이라고 나오면 어떻게 하나 하며 마음을 졸였기 때문이다.
담당직원은 마음에 걱정거리가 있다든가 고민하는 게 있을 경우엔 건망증이 심화되는 경우가 많다고 알려주었다. 아마도 사모님이 작고하신데 대해 큰 쇼크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과거의 고통거리는 점차 기억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사소한 일이 된다고 했다. 그래서 설령 오늘 내게 어떤 걱정거리가 생겼다 해도 전체 인생길에서 보면 별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도 했다.
물론 한 때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해서 지금도 그러한 고민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닐 수도 있다고도 했다. 왜냐하면 매일 매일 새날이 오면 나름대로 새로운 걱정거리가 또 찾아오게 마련이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 경우는 일순간에 일어난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안심 시켰다. 그렇다고 해도 뇌를 단련시키는 운동은 계속하라고 당부했다. 이를테면 책을 읽거나 글을 써본다든가 해보라는 것이다.
그는 또 매번 찾아오는 걱정거리를 너무 힘들어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살다보면 웬만한 걱정거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히 잊혀 진다는 것이다. 그날그날 주어지는 하루를 열심히 살다보면 사소한 걱정거리는 금방 잊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게 걱정거리를 빨리 잊는 최선의 길이라는 것이다.
사실 지나가버릴 걱정거리에 얽매여 시간을 허비하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 그러니 내일을 위해 오늘을 의욕적으로 전진하는 것이야말로 고민 속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는 명쾌한 해결책일 수 있다.
업무에 의욕적일 때 이른바 ‘망각’이라는 명약이 고민거리를 치료해준다고 본다. 요즘 실제로 출근해서 일에 묻히다보면 아내의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나는 아내가 발병한 이후로 거의 일주일에 한 번은 퇴근길에 지하철 용산 역에서 내려 그곳 마트에 들르곤 했었다. 아내가 늘 식사를 할 때면 입맛이 없고 반찬이 대개 쓰다고 해서 입맛에 맞는 반찬거리를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문제는 살 것을 적어 가지고 가지 않았다가 그 때마다 사려고 했던 식품들을 자주 빼놓기가 일쑤였다. 그래서 어떤 때는 마트를 나와 노량진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다시 노량진 역에서 용산 역으로 되돌아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 때마다 이거 혹시 내가 치매라도 걸린 게 아닌가 하여 걱정하곤 했다.
그러나 아내가 떠난 이후론 용산 마트에 가는 일도 드물어졌다. 그래서 그런 실수도 그만큼 줄어들었다. 어쩌다 용산 마트에 가더라도 아내가 없으니 구입하는 식품 가지 수가 크게 줄어들었다.
간혹 맛있는 과일이나 고기류 또는 반찬 류가 눈에 보여도 손이 가질 않는다. 그래서 늘 시장바구니가 전보다 가벼워졌다. 그래도 오늘은 손자가 좋아하는 돼지갈비를 몇 근 샀다. 집에서 기다리는 손자가 보면 좋아할 모습을 상상하니 나도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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