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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에 탈번한 『열하일기』>(251) 2014.2.26.

양곡(陽谷) 2024. 2. 26. 22:11

<불에 탈번한 『열하일기』>(251)
2014.2.26.
만일 『열하일기』에 수록된 『호질』과 『허생전』이 없었다면 조선후기 한문소설사는 매우 쓸쓸했을 것이다. 『열하일기』는 1780년 연암 박지원(字 美仲, 1737∼1805)이 청나라 건륭황제의 칠순연(七旬宴)을 축하하기 위하여 사행(使行)하는 삼종형 박명원(朴明源)을 수행할 때 쓴 연행(燕行) 문학의 백미이다.

이 『열하일기』가 하마터면 불에 타서 재가 될 번했다. 연암은 자신이 쓴 『열하일기』를 자랑스럽게 읽자, 고문진흥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하여 이를 불태우려했던 사람이 있다. 바로 고문주의자였던 박남수(朴南壽, 자 山如, 1758∼1787)이다. 이 이야기가 남공철(南公轍, 1760∼1840)이 지은 박남수의 묘지명(朴山如墓誌銘 , 金陵集 三, 권17)에 나온다.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보자.

“내가(남공철) 일찍이 연암 박지원을 쫓아 박남수의 집 벽오동관정에 모였다. 청장관 이덕무(1741∼1793) 자 懋官)와 정유(貞㽔) 박제가(朴齊家, 1750∼1805, 자 次修) 도 있었다. 이날 밤 달이 밝았는데 연암이 만성(曼聲)으로 그가 지은 열하일기를 읽고 있었는데, 이덕무와 박제가가 둘러앉아 들었다. 박남수가 연암에게 “선생의 문장은 비록 훌륭하나 패관기서를 좋아하여 이로부터 고문(古文)이 부흥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山如謂燕岩曰, 先生文章雖工, 好稗官奇書, 恐自此古文不興).”라고 하였다. 연암이 취하여 말하기를 “그대가 무엇을 아느냐?”하고서는 다시 전과 같이 읽었다.

박남수도 그때에 역시 취하였기에 앉은 자리 곁에 있던 촛불로 『열하일기』를 태우려고 하였다. 내가(남공철) 급하게 만류하여 그만 두었다(山如時亦醉, 欲執座傍燭, 焚其藁. 余急挽而止.) 연암은 노하여 몸을 돌려 눕고 일어나지 않았다. 이에 이덕무가 거미 한 폭을 그리고 박제가가 병풍에 「음중팔선가」를 지어서 초서로 쓰니 종이가 다하였다. 내가(남공철) “글씨와 그림이 지극히 현묘하니 연암께서 마땅히 발문을 지으셔야 삼절(三絶)이 됩니다.”라고 하며 연암의 마음이 풀어지게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연암은 더욱 노하여 더욱 일어나지 않았다.

날이 새고 연암도 술이 이미 깨었는데 문득 옷깃을 바르게 하고 꿇어앉아 말하였다. “산여(박남수)야! 앞으로 오라! 내가 세상에 궁한 지가 오래되었다. 문장을 빌어 괴뢰의 불평지기(不平之氣)를 한번 쏟아내어 마음대로 유희(遊戱)한 것일 뿐이지 어찌 즐겨서 하였으리오?(天且曙, 燕岩旣醒, 忽整衣詭坐曰, 山如來前. 吾窮於世久矣. 欲借文章, 一瀉出傀儡, 不平之氣, 恣其遊戱爾, 豈樂爲哉.) 산여(박남수)와 원평(元平, 남공철 의 字)은 소년으로 아름다운 자질을 갖추었으니 문(文)을 하려면 나를 배우지 말고, 정학(正學)을 흥기시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서 후일 왕조에 문장의 신하가 되거라! 내 마땅히 제군들에게 벌을 받으리라!”하고서는 술 한 잔을 다시 마시고 또 무관(이덕무)과 차수(박제가)에게 권하여 마시게 하니 드디어 크게 취하고 환호하였다.

내가 이일로 연암의 기기(奇氣)와 마음을 비운 도량에 탄복하였고 그리고 더욱 산여(박남수)의 의논이 정론이었음을 알았다. 만약 나이를 빌려주어 그 배운 바를 극명케 하였다면 반드시 장차 가히 볼만한 것이 있을 것인데 불행하게도 단명하여 죽었도다. 비록 그러나 그 아까운 것이 어찌 유독 이것뿐이겠는가?”

이 남공철의 기록에서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찾을 수 있다. 첫째, 박남수가 연암 박지원을 비롯하여 조선후기 문단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이덕무 박제가 남공철 등과 교유하였음과, 아울러 모임의 장소가 그의 집인 벽오동정관(碧梧桐亭館)이었다는 점이다.

둘째, 박남수가 아무리 술이 취했다고는 하나, 21세 연상이며 삼종조(三從祖)이자 선생인 연암이 지은 『열하일기』가 패관기서라서 고문진흥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하여 불태우려한 것이다. 만일 이때 불에 탔다면 조선 후기 한문학사는 쓸쓸 했을 것이다. 남공철이 만류하지 않았다면 『열하일기』 불타서 없어졌을 지도 모른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셋째, 연암이 박남수가 『열하일기』는 패관기서를 좋아한 것이고 고문부흥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지적을 전폭적으로 수용한 점이다. 연암 자신이 궁하게 산지가 오래되어 괴뢰의 불평지기(不平之氣)와 같이 한번 쏟아내어 글로써 유희한 것(以文遊戱)일 뿐이지 즐겨서 한 것이 아니라고 인정한 것이다. 아울러 문장을 하려면 자기를 배우지 말고 정학(正學)을 흥기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으라고 한 것이다. 박남수의 지적을 모두 인정하고 수용한 것이다. 이것은 『열하일기』가 연암이 추구했던 문학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었음을 뜻한다. 즉 연암도 때를 못 만나 오래 불우하게 살다보니 괴뢰의 불평지기로 『열하일기』를 썼을 뿐, 자신이 추구한 것은 정학을 흥기시키는 데 기여하는 문학이었음을 고백한 것이다.

넷째, 박남수가 30세로 단명하지 않고 장수하였다면 학문과 문장으로 더욱 큰 업적을 남겼을 것이라고 남공철이 애석하게 여긴 점이다. 이와 같은 남공철의 증언을 통하여 박남수가 철저한 고문주의자임을 알 수 있다.

박남수는 명문의 후손으로서 부친 사후 7개월만에 유복자로 태어나 고단한 삶을 살다 30세로 세상을 떠났으나 우리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는 1775년(영조 51)에 18세의 나이로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명문의 한글 제문 「을미구월졔문」(乙未九月祭文)과 「을미사월재동포쳔장사졔문」(乙未四月齋洞抱川葬事祭文) 2편을 남겨, 18세기 한글 애제(哀祭)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박남수는 고문(古文) 지상주의자였다. 그가 22세(1779) 때 지기인 남공철에게 답한 글(答南元平)을 보면, 문장은 진(秦) 한(漢)을 조종(祖宗)으로, 당 ․ 송을 원류로 삼았고 명말 ․ 원 ․ 청 잡가의 문장을 배격하였다. 이런 그가 『열하일기』를 수용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당시 벽오동정관에 모였던 연암과 이덕무와 박제가와 박남수와 남공철은 조선 후기 문학사를 빛낸 거장들이다. 정말 불에 태우려고 했을까마는 박남수의 당돌한 행동, 이를 잽싸게 말린 남공철, 삐져 돌아누운 연암, 연암의 화를 풀어주기 위해 거미 그림을 그린 이덕무, 음중팔선가를 일필휘지한 박제가, 그리고 다음날 연암의 언행 등은 소설보다 흥미진진하다. 이들의 만남과 풍류가 얼마나 멋진가! 옛 선비들은 이렇게 살았다.
우리의 삶은 어떤가? 이런 풍류와 멋이 있는가?

○ 오늘(2014.2.26.수)은 10시 부터 12시까지 중앙교육연수원(원장 김재갑) ‘제14기 고급관리자 과정’에서 「역사에서 배우는 공직윤리」를 강의(11 - 804)한다.

<사진 : 1번 중국 산해관, 2번 청나라 황제 피서산장인 열하, 3 - 4번 만리장성. 4번 모택동 글씨로, 만리장성에 오르지 않으면 사내대장부가 아니다(不到長城非好漢)라는 뜻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