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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사 연재 23. 19세기 유럽의 정치철학 (Continued 8 )/PhD. Hugo W. Kim

양곡(陽谷) 2023. 9. 5. 16:57

문명사 연재 23. 19세기 유럽의 정치철학 (Continued 8 )

(g) 형이상학적 관념주의에 대한 반동

이마누엘 칸트의 초월적 관념주의 철학은 요한 피히테, 프리드리히 셸링, 게오르그 헤겔에 의해 인도되어 형이상학적 관념철학으로 변화하였다. 피히테는 물 자체(Thing-in-itself) 대신에 자아의식(Self-consciousness)의 본성을 소개하였고, 셸링은 저술에서 심미학과 신학으로 옮겨갔으며, 헤겔은 의식, 자아의식, 이성, 정신, 종교, 절대 지식 등의 논리적 관계를 통하여 절대적 관념주의(Absolute Idealism)를 확립하였다. 헤겔의 정치적 저술은 정치적 이념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주었으나, 형이상학적 관념주의에 대한 반동세력이 여러 방향 (실존주의, 현상론, 실용주의, 분석철학)에서 나타났다. 다음에서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쇠렌 키르케고르, 프리드리히 니체의 철학사상을 살펴본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1788-1860)] 그는 단치히에서 출생하여 괴팅겐대학과 베를린대학에서 수학하고 1813년 예나의 튀링겐주립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820년 베를린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하였으나 인기가 없어 한 학기로 마감하고 여행과 연구를 하였다. 1833년 프랑크푸르트로 이주 정착하여 생애 동안 연구와 저술을 하였고, 1860년 폐렴으로 사망하였다.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1813)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으로 사물이나 현상의 지식을 지배하는 일반원칙은 충족 이유의 원칙으로, 사물의 4종류와 관계의 4종류를 기술하였다. 첫째 사물의 4종류는 직관적 실증적 완전한 발표; 추상적 개념과 관계의 형태를 판단; 선험적 직관; 의지의 주제(알고 있는 주제에 대한 대상)를 포함한다. 주제와 의지(행동) 사이의 관계 지식을 지배하는 원칙은 행동 근거의 원칙 또는 동기의 법칙이다. 둘째 인간은 동기를 위해 행동하고, 그가 행동하는 동기는 충분한 이유나 근거를 가진다. 따라서 세계는 현상이고 주제에 대한 대상이며, 그들 사이의 관계는 충족이유의 원칙이 지배한다.

그의 대표적 저술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1918년에 출간하여 1844년에 제2판을 발행하였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우주의 지상 원칙은 내적 성찰을 통하여 명시된 일반원칙으로 우리가 세계를 철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자아의식의 원칙적이며 합리적으로 우러나오는 의지가 아니고, 본능적 충동에 기초한 비이성적 주장이며, 의지의 개념에서 합리성이나 지성이 빠져 있다. 우리의 감각은 독립하여 존재하는 미지의 사물에 의하여 연유한다는 칸트의 입장을 거부하였다. 우리의 신체는 두 가지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어졌으며, 첫째 우리는 물리적 사물의 운동을 관장하는 자연법을 전제로 자신의 육체를 다른 사물과 같이 물리적 개체로 인지하며, 둘째 우리는 우리들의 육체가 즉각적인 인식을 통하여 환희와 고통과 감정적 상태를 직접 느낀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육체는 대표성(객관적, 외부적)과 의지(주관적, 내부적)로 주어졌으며, 육체의 행위는 목적된 의지의 행위일 뿐이다. 세계는 전체로서 의지의 세계와 대표성의 세계로 양면을 가지고, 의지의 세계는 그것이 그 자체 내에 있을 때의 세계이며, 대표성의 세계는 우리의 생각이나 사물에 표출된 세계이다. 의지와 대표성의 세계는 각각 실재와 표출의 세계이다. 인간 의지는 (대표성 뒤의 세계에 대한) 하나의 창으로, 칸트의 물 자체이다. 그러므로 대표성과 물자체의 관계는 인간의 의지와 육체 사이의 관계에 대한 유사성으로 이해할 수 있으므로 우리는 물자체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전 세계는 (개인 의지들의 현상인) 단일 의지의 대표성이다. 이처럼 그의 형이상학은 칸트가 수립한 한계를 벗어났으며, 칸트의 12개 범주 가운데 시간과 공간을 제외한 11개 범주를 거부하였다. 그의 저술은 제1권 인식론, 제2권 존재론, 제3권 심미학, 제4권 윤리학으로 되어 있고, 부록으로 칸트철학의 비판을 실었다. 쇼펜하우어는 여러 측면에서 칸트에 뿌리를 두었으나, 물 자체가 감각을 연유한다는 칸트의 입장에 반대하여, 물 자체와 우리들의 감각은 동전의 양면과 같으며, 어느 쪽도 다른 쪽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루트비히 포이어바흐(1804-72)] 그는 독일 바바리아에서 태어나 1824년 베를린대학에서 2년 수학 중 청년 헤겔파에 가입하였고, 에를탕겐대학에서 “무한성, 단일성, 그리고 이성의 보편성에 관하여“의 논문으로 1828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죽음과 불멸에 대한 고찰(1830), 근세 철학사(1833-37), 아벨라르와 엘로이즈(1834)을 저술하였고 1837년 결혼하여 부인의 브루크베르크 도자기 공장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의 대표적 저술 기독교의 본질(1841)은 신학에 인간성을 부여하였고, 이 저술은 그에게 학자적 명성을 안겨주었으나, 그의 무신론과 인류학적 물질주의는 비판을 받았다. 이 시기에 포이어바흐는 독일 급진주의 지도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1848년 독일 3월 혁명 동안 포이어바흐는 종교적 정통주의를 비판하여 혁명파의 지지를 받았으나 실제로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 시기에 하이델베르크에서 종교에 관한 연설을 하였다. 1860년 도자기 공장의 실패로 그곳을 떠나 친구의 도움으로 궁핍하게 살면서, 신성, 자유, 그리고 불멸(1866)을 출간하였다.

그의 대표적 저술 기독교의 본질은 제1부에서 종교의 진실(인류학적 본질)을 주제로, 인간이 지성의 능력을 신의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만약 인간이 신 안에서 만족을 찾으려면 신 안에서 자기 자신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신은 인간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의 내적 본성을 외부로 투사한 것이다. 신과 초월적인 존재는 만들어진 환상이며 자비롭지도, 공정하지도 현명하지도 않은 신은 신이 아니다 하였다. 제2부에서 종교의 거짓(신학적 본질)을 주제로 신은 인간의 도덕성과 인간성을 구원한다. 인간이 자신의 개인성을 포기하고 이기적 존재인 신에게 맡긴다고 주장하여 자신의 이전 주장과 모순이 생긴다. 신의 이기성은 인간을 자극하여 인간이 사악하고 타락하도록 투사하므로 인간이 선할 수 없고, 선한 존재는 오직 신밖에 없다. 여기에 신을 숭배하여 인간의 단점을 보여주고 자신의 이전에 보여준 모순된 입장을 줄이려고 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포이어바흐의 무신론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쇠렌 키르케고르(1813-55)] 그는 1930년 코펜하겐대학에 신학으로 입학하였으나 문학과 철학에 몰입하여 1941년 “아이러니의 개념: 소크라테스를 염두에 두고”의 논문으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철학적 저술은 추상적인 생각보다 구체적 인간의 실재에 우선을 두고, 개인의 선택과 헌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 개인으로서 인생을 어떻게 사는가의 이슈를 다루었다. 비과학적 후기의 결론(1846)에서 그는 인생을 3단계로 구분한다. (1) 심미적 단계: 심미적 인간은 감각, 충동, 감정에 의해 지배되고, 의식의 특성은 도덕 기준의 부재, 종교적 믿음의 부재, 감성을 즐기려는 욕망의 실재이다. 기쁨의 추구나 감각적 향락은 자신의 분산(타락)으로 공허한 불만을 가져온다. (2) 윤리적 단계: 윤리적 인간은 명확한 도덕적 기준과 의무, 보편적 이성의 소리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생활에 일관되게 적용한다. 윤리적 인간은 인간의 약점을 자신의 의지로 극복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정화의 능력이 부족하여 한계에 직면하고, 신을 향하여 움직인다. (3) 종교적 단계: 믿음의 인간은 이성의 기준으로 측정할 수 없는 절대적 신에 관련된다. 신은 절대자로 존재가 증명되는 사물이 아니다. 믿음 보다 상위의 입장이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실존의 개념: (1) 객관적 지식의 목표는 정당하나 개략적으로 성취된다. 실재는 신을 위한 체제이며, 인간의 인식주체를 위한 체제가 아니다. (2) 사색적 철학은 그것이 약속한 것으로 인도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최상의 인간 임무는 인식이 아니고 개인적 경비지출이나 (통찰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선과 정의의 실현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자아가 되는 것은 실존, 내재, 주관성이다. (3) 실존은 인간의 주체성에서 출발하며, 내가 있다는 전제로부터 자아와 세계를 연결한다. 실존하는 개인은 관객이 아니라 행동하는 주체이며, 인생의 형태와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결정한다. (4) 실존은 분리 또는 유한성과 신을 향한 항구적 투쟁이다. 키르케고르의 영향: 그는 사후에 철학, 신학, 심리학 분야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 사상가로 실존주의 선구자가 되었다. “시대가 필요한 것은 천재가 아니다. 그들은 항상 넘쳐났다. 시대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순교자이다.”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 니체는 프러시아 작센의 루터교 목사 가정에서 태어나 1864년 본대학에 입학하고, 다음 해 라이프치대학으로 전학하여 철학을 공부하여 1869년 논문 없이 저술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스승 리츨은 “그가 원하면 어떤 것도 간단히 해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니체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스승의 추천으로 1969년(24세) 스위스 바셀대학 고전철학 교수가 되었다. 니체는 1970년 프랑스-프러시아 전쟁에 군의관으로 참전하여 부상으로 바젤대학에 돌아와 가르치며 저술을 하였다. 니체는 건강이 나빠져 1879년 교수직을 사임하고 저술을 계속하였으나, 1889년부터 급격히 쇠약하여 폐렴과 심장마비로 1900년 병사하였다. 다음에서 니체의 저술을 통하여 그의 철학적 사상을 살펴본다.

아폴로와 디오니소스: 그의 저술 비극의 탄생(1872)에서 니체에 의하면, 마음과 질서의 아폴로 세계와 정열과 혼돈의 디오니소스 세계가 그리스 문화의 기본원리를 구성하였다. 아폴로는 환상으로 꿈꾸는 상태이며, 디오니소스는 본능의 해방과 경계선의 해체를 대변하는 중독된 상태이다. 인간은 사티로스로서 개별성 원칙의 절멸을 혐오하고 동시에 파괴 속에서 환희를 느낀다. 이들 원칙은 자연의 힘으로서 예술을 통하여 인간에게 나타나는 인식 상태이다. 관점주의: 니체는 지식이 여러 가지 유동적 관점이나 관심에 관련하여 임시적이고 조건적이다는 객관적 실재의 개념을 거부하였다. 이로 인해 관망자의 환경에 따라 꾸준히 규칙을 재평가를 요구한다. 다른 인간들 가운데 공통적인 것은 가치를 창출하는 행위이다.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그들의 믿음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가치를 부여하는 행위이다. 노예 반란과 도덕: 선과 악의 저쪽에서(1886)와 도덕성의 계보에 관하여(1887)에서, 초기 형태의 도덕성은 전사 귀족과 고대 지배계급이 형성하였고, 주인 도덕성이 초기 도덕체계를 수립하였고, 노예 도덕성은 주인 도덕성의 반동으로 발전하였다. 노예 도덕성은 회의적이며 두렵고, 그들의 가치는 자기인식을 개선하기 위하여 출현하였다. 니체는 노예가 자신의 여건을 극복도록 평등의 개념을 주장하였다.

신의 죽음과 허무주의: 즐거운 과학(1887)과 다른 몇 저술에서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언급하였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 도덕은 사람들에게 본질적 가치, 신에 대한 믿음, 객관적 지식을 위한 기초를 제공한다. 객관적 지식이 가능한 세계를 건설하면서, 기독교는 허무주의의 근원적 형태에 대한 해독제이다. 만일 신이 죽는다면, 인간이 매달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의 존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힘의 의지(Will to Power): 자기보존을 위한 드라이브는 인간과 동물 행위의 주된 동기로서, 신의 의지이다. 공리주의자들은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행복해지고 삶에서 기쁨을 축적하려는 욕망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니체는 그러한 행복의 개념은 영국 사회 자본주의의 제한된 특성으로 거부하고, 행복은 어떤 사람의 행동과 의지의 성취에 대한 장애물을 극복하는 결과라고 하였다. 영원한 반복: 세상의 모든 사건은 순환의 영원한 연속을 통하여 같은 경로로 반복한다. 이는 끝없는 삶의 반복과 가치 있는 삶에 대한 감정적 반응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만일 개인이 그들의 행동을 통하여 자신들을 구성하면, 그들은 현재 상태에서 과거 행위의 반복 속에서 같은 패션으로 살면서 그들 자신을 유지할 수 있을 뿐이다. 극복하는 인간: 도덕과 신앙을 뛰어넘는 인간은 창조하는 인간이다. 탈아적 가치를 극복하고 새로운 가치를 생성하는 인간이 극복하는 인간이다.

저술의 평가와 영향: 니체의 생전에 그의 저술은 무시당했고, 종교계와 도덕주의자들로부터 무신론(신은 죽었다)으로 사회를 타락시킨다는 비방과 음해를 받았으나, 그의 사후에 유럽의 철학과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니체의 사상은 권위에 불복했던 쇼펜하우어의 영향으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1894-95년 독일 보수주의자들은 전복을 우려하여 그의 저술의 판매금지를 원하였다. 19세기에 니체의 사상은 무정부주의 운동과 연관을 가졌으며 특히 프랑스와 미국에서 영향을 주었다. 니체의 사상은 오늘날의 표현주의, 실존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독일 우익 군국주의와 좌익 정치에 영감을 주었다.

Notes: 실존주의는 1940년대와 1950년대에 유럽을 풍미하던 사상적 흐름으로 사르트르와 카뮈에 관해 문명사 연재 28 에서 자세히 논한다.

TO BE CONTINUED
(h) 공리주의와 영국의 관념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