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사 연재 23. 19세기 유럽의 정치철학 (Continued 4)/ PhD. Hugo w. Kim
문명사 연재 23. 19세기 유럽의 정치철학 (Continued 4)
(c) 사회주의(Socialism)
마르크스 이후의 사회주의 이론
제1 인터내셔널(1864)은 런던에서 창립되었고, 제2 인터내셔널(1889)은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20개국의 대표단 384명이 (노동자와 사회주의자 단체를 대표하여) 참가하여 파리에서 창립되었으며, 무정부주의자들과 노동조합원은 참석이 거부되었다. (1) 무정부주의(Anarchism)는 권위에 대해 회의적이며 계급제도의 모든 비자발적 강제적 형태를 거부하는 철학이며 운동으로, (원하지 않고, 불필요하고, 해로운) 국가의 폐지를 요구하여,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지배가 없는 상태를 원하였다. 이는 극좌 운동으로, 통상 자유주의적 마르크스주의와 병행하는 사회주의 운동이다. 무정부주의 운동은 19세기 후반부터 세계대전 이전에 세계 여러 지역에서 번창하였고, 노동자 해방을 위한 투쟁에 의미 있는 역할을 하였으며, 1939년 스페인 내전이 끝나고 막을 내렸다. (2) 독일은 노동자협회(1863)와 사회민주노동당(1869)이 통합하여 사회노동당(1875)이 되었고, 반사회주의법으로 1878년부터 활동이 금지되었으나 1890년 해제되어 독일 사회민주당(SPD)으로 개명하였다. 사회민주주의(수정주의)에 관하여는 다음에 별도 논의한다. (3) 소련연방: 레닌은 1917년 혁명에 성공하여 공산당 조직으로 소련연방을 구성하고, 혁명적 사회주의를 유럽에 전파하였다. 제3 인터내셔널은 코민테른(1919-43)이라고 부르며 레닌이 창립하고 스탈린이 해체하였다. 스탈린은 레닌과 달리 1924년 일국 사회주의를 추구하여, 1829년부터 트로츠키를 제거하고 소련연방 내에서 공산주의 체제를 강화하였다. 마르크스 사후에 사회주의 운동은 그와 같은 지배적인 사상가가 없었으나, 정통 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 레닌주의, 사회민주주의와 같은 세 개의 사회주의 주류가 나타나 현실정치에 영향을 주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Orthodox Marxism)]: 1895년 엥겔스 사후에 칼 카우츠키(1854-1938)가 선도하였다. 그는 체코-오스트리아의 철학자, 언론인,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소비에트 국가에 관한 레닌-트로츠키 논쟁에 관하여 볼셰비키 혁명을 비판하였다. 카우츠키는 비엔나대학에서 역사 철학 경제학을 공부하였고, 1875년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의 당원이 되었다. 스위스의 독일 사회주의자 그룹에 가입하여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고, 1881년 영국을 방문하여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만났다. 1883년 그는 한 월간 잡지사를 세워 1890년부터 주간하여 발행하고 1917년까지 편집인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하였다. 그는 1885-90년 런던에 체재하면서 엥겔스와 가까운 친구가 되었고, 엥겔스는 그에게 마르크스 자본론 세 권의 편집을 맡기었다. 엥겔스 사후 1895-1914 기간에 그는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이 있는 마르크스주의 이론가가 되었다. 1890년대 말 번스타인이 수정주의 입장에서 전통적 마르크스주의를 공격할 때에, 카우츠키는 (사회적 윤리를 강조하는) 그가 진보적 자본가들이나 비 계급투쟁 노선과 동맹을 위해 길을 내는 것이다고 비난하였다.
1914년 독일 사회민주당이 1차 대전을 지지할 때, 카우츠키는 독일이 러시아의 위협에 대항하여 방어적 전쟁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1915년 정부가 야만적인 고비용의 전쟁을 지속할 것을 인지하고, 그는 사회민주당의 전쟁지도자들에 반대하는 번스타인에게 호소하고, 독일 정부의 병합정책을 비판하였다. 그는 1917년 사회민주당을 떠나 독립 사회민주당으로 옮겨, 반전 사회주의자들을 단합시켰다. 독일의 11월 혁명(1918) 이후 카우츠키는 단명한 혁명정부의 외무부 차관보로 재직하여 독일제국이 일으킨 전쟁의 유죄를 증명하는 서류를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전후 독일은 이원집정부제로 바이마르 공화국(1919-33)을 수립하였다. 카우츠키는 조지아를 방문하여 1921년 러시아의 적군이 조지아 민주공화국을 침공하여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하는 것을 보았다. 조지아 침략으로 인한 파괴와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실제 노동자 계급이 가지는 미미한 정치적 역할 때문에 소련연방은 제국주의 국가가 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카우츠키의 유산은 (1) 반 볼셰비키 논쟁 (2) 마르크스의 자본론(3권)을 편집 출간 (3) 독일 사회 민주주의당의 단합이라고 할 것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Marxism-Leninism)]: 1917년 10월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공산당으로 개명하고, 그 지도자들은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가로서 그들 세계에서 확실한 권위를 누렸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소련연방과 그 위성국가에서 지배적 이념이 되었다. 소련연방을 단번에 사회주의로 만들려고 시도하면서, 볼셰비키가 러시아 내전으로 싸우는 동안, 레닌은 국가의 생산성이 위험 수준으로 추락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내전이 끝나고 레닌은 신경제정책으로 경제를 재편성하여 점진적으로 사회주의화 하려고 시도하였다. 1924년 조셉 스탈린은 적과 동지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하여 소련연방을 재편성하고, 공포정치를 통해 독재 권력을 1953년 그의 사망 시까지 유지하였다.
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은 부유한 중산층에 태어나 사회주의 혁명사상을 품고 러시아 황제의 통치에 저항하는 시위 참가로 인해 카잔 제국대학에서 퇴학당하고 세인트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1급 법학 학위를 받았다. 그는 1897년 선동죄로 체포되어 서부 유럽으로 망명하였고, 마르크스주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저명한 이론가가 되었다. 그는 1903년 멘셰비키 반대하는 볼셰비키 정파의 이념적 분리에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멘셰비키는 부르주아 혁명은 부르주아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프롤레타리아가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레닌은 민주적 혁명에서 노동자 계급이 혁명을 주도해야 하고, 신뢰할만한 유일한 동맹은 소작 농민 계층이며, 자본가 계급은 반혁명 세력으로 그들 자신의 혁명을 하기에는 너무 비겁하여, 노동자와 농민이 연대한 혁명으로 독재정권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레닌은 실패한 러시아혁명(1905)에서 폭동을 조장하였고, 1907년 러시아에 친위 쿠데타가 일어나 볼셰비키 세력은 지하로 숨고, 레닌은 다시 망명길에 올랐다. 볼셰비키는 1912년 프라하 당 대회에서 멘셰비키와 결별을 선언하고 독립된 당이 되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광범위한 유럽 노동자 혁명으로 변화하도록 운동을 전개하였고, 세계대전이 자본주의를 뒤엎고 사회주의로 대치할 것이다고 믿었다.
1917년 2월혁명으로 황제를 축출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하자, 레닌은 러시아로 돌아와 10월 볼셰비키 혁명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고, 레닌의 새로운 정부는 처음 좌익 사회주의 혁명세력, 선출된 소비에트, 헌법 의회가 권력을 공유하였으나, 볼셰비키는 공산당으로 개명하여 권력을 중앙에 집중하였다. 레닌의 행정부는 토지를 농부들에게 재분배하고 은행과 대규모 기업은 국유화하였다. 레닌은 중앙세력(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오토만 제국, 불가리아)에 영토를 양도하는 평화조약에 서명하여 세계대전으로부터 철수하고 코민테른을 통하여 세계혁명을 증진하였다. 반대자들은 비밀경찰에 의해 자행되는 폭력적 붉은 테러로 진압되고, 수만 명이 살해되거나 집단수용소로 보내졌다. 레닌의 행정부는 1917-22년 러시아 내전에서 반 볼셰비키 군대를 패퇴시키고 폴란드-소비에트 전쟁(1919-21)을 감독하였다. 전쟁의 파괴, 기근, 대중봉기에 대응하여 레닌은 1921년 시장 지향적 신경제정책을 통하여 경제성장을 장려하였다. 1924년 그는 건강 악화로 사망하고 조셉 스탈린이 권력을 계승하였다.
레닌의 혁명이론: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이 억압과 착취에 대한 분명한 계급의식과 절망적 상황을 인식하도록 가르치는 노동조합과 다른 선동가들에 의존하여, 노동자 혁명이 자동으로 일어나 자본주의 국가를 끝내고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실현된다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레닌은 노동자 계급은 혁명집단의 개입 없이는 계급의식을 발전시키지 않으며 혁명을 점화하기 위하여 다른 그룹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마르크스는 전위대가 노동자들이 자아의식을 개발하도록 도와 혁명에 접근을 촉진할 수 있다고 하였으나, 레닌은 전위대(Vanguard) 자체가 (노동자 계급이 자아의식을 개발하기 전에) 정부를 무너트리고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주요한 혁명 요원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차이는, 마르크스는 노동자 계급이 지배적 다수가 되어 분명한 계급을 인식한 후에 반란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존재하며, 소수의 비-노동자 계급을 재교육하여 계급이 없는 사회를 창출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레닌은 마르크스가 기대하는 상황에 도달하기 오래전에 전위대가 혁명을 일으킨다고 하였다. 따라서 지배적 다수의 통치 엘리트가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전에 소수 전위대가 사회주의 실현을 강요하므로, 이러한 여건에서 사회주의를 구현하기가 어렵고, (이상사회를 실현하기 전에) 대다수가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로 변화하므로 프롤레타리아 독재 기간이 길어진다고 보았다. 혁명 전위대는 작고 엄한 규율을 가진 헌신적인 집단이라고 레닌은 명확히 규정하였고, 볼셰비키 당은 혁명을 수행하고 전 사회가 유토피아 단계에 들어가도록 준비되기 전까지 독재를 강요하였다. 따라서 레닌에게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프롤레타리아 집단에 의한 독재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를 지배하는 볼셰비키(전위대)의 독재라고 볼 수 있다. 레닌은 국제적 수준의 프롤레타리아 전위대로 1919년 국제 공산주의 운동(코민테른)을 창설하여 유럽 전역에 사회주의 혁명을 조장하였다. 그러나 레닌의 국제적 사회주의와 대조적으로 스탈린은 러시아 내의 러시아 국민주의 (일국 사회주의)를 추구하였다.
레닌의 제국주의(Imperialism): 20세기 초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자본주의자, 보수주의자, 성장하는 사회주의자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그의 핵심 이론인 변증법적 물질주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예측하였으나 결코 일어나지 아니하였다. 수정주의자들이 지적하듯이, 산업 국가들에서 노동 여건이 개선되어 혁명은 실현되지 못하였고, 레닌은 이 딜레마를 해결하려고 자본주의의 경향을 연구하였다. 기업의 규모가 커지면서 기업의 자본 수요가 증가하자, 기업은 자본조달을 은행에 의존하였다. 마르크스는 새로운 금융구조를 예측하지 못하였고 레닌은 이를 금융자본주의라고 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여건에서 생산수단의 소유자(은행가나 금융인)는 그들이 통제하는 공장의 생산성에 아무 기여 없이 노동자들로부터 기업의 이윤(잉여가치)을 빼앗아갔다. 국내시장에서 이윤을 만들지 못하는 기업들은 소유권의 집중으로 해외시장을 공략하였다. 마르크스가 예언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국내에서 불가하여, 그들은 식민주의를 통해 자본주의 착취를 해외 식민지로 수출하기 시작하였다고 레닌은 평가하였다.
레닌은 국내 착취로 형성된 긴장을 완화하기 위하여, 자본가들은 해외에서 얻은 새로운 이윤을 국내 노동자들과 나누어, 국내 노동자들은 식민지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주의의 파트너가 되었다. 그러나 식민지 자원은 고갈되고 제국주의 국가들은 갈등과 분쟁으로 서로 싸워 결국은 자멸한다고 보았다. 레닌은 1916년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마지막 단계라고 선언하고, 제1차 세계대전은 그들의 식민지 분쟁을 해결하려는 거대한 투쟁이며, 자본가들이 전쟁으로 자원을 소진한 후에, 사회주의자들은 서방 국가의 정부를 장악하여 분쟁에서 오는 이익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레닌은 제국주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1) 생산과 자본의 집중이 최고의 단계로 발전하여, 경제생활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독점을 창출하였다. (2) 은행자본과 산업자본이 결합하여 금융자본의 기초위에 소수 금융독재를 형성하였다. (3) 자본의 수출은 상품의 수출과 구별되어 매우 중요하게 되었다. (4) 국제 자본가들의 독점 형성으로 그들이 세계를 공유하였다. (5) 대 자본주의 국가 간에 영토의 분할은 완료되었다.
레닌의 유토피아: 레닌은 볼셰비키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사용되는 경제체제를 국가 사회주의라 불렀다. 국가에 고용된 노동자들은 이윤을 만들고 그 잉여가치는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투자로 사회에 환원한다. 노동자 계급의 독재는 사회주의 윤리를 고취하는 집단교육을 하거나 그들을 사회로부터 제거하였다. 프롤레타리아 유토피아를 성취하기 위하여, 레닌은 노동자들이 생산성을 향상하면 보상하고, 게으른 사람은 생산성 부족에 대하여 벌을 가하였다. 많은 사람이 사회주의자가 되면, 그들 사이에 계급 차이가 줄어들고 계급투쟁이 감소한다. 인간의 투쟁이 사라지면 국가의 필요성도 희미해지고, 모든 사람이 평화롭게 살고 일하는 이상적 사회가 도래한다. 유토피아의 경제체제는 사회주의로부터 공산주의로 전환되고,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고 레닌은 주장하였다. 레닌의 저술 가운데 국가와 혁명(1917)은 국가와 사회의 역할,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필요성, 사회민주주의의 이론적 부적절성을 기술하였다.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y)]는 수정주의(Revisionism)라고도 하며 자본주의 경제의 틀 안에서 사회 정의를 증진하기 위하여, 경제와 사회에 국가 개입을 지지하는 정치, 경제, 사회적 이념이며, 집단적 교섭 준비, 대의 민주주의의 수행, 소득 분배의 측정, 일반적 이익과 복지국가 건설에서 경제 규정 등에 관련된 정책 체제이다. 앞서 진화적 사회주의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제2 인터내셔널 이후 사회주의 운동은 혁명과 개혁으로 분리되었고, 사회적 민주주의는 (1) 자유민주주의 원칙을 지지하며, 정치적 변화는 평화적이며 헌법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2) 자본주의는 부를 생산하는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수단이며, 사회주의는 질적으로 자본주의와 다르지 않다. (3) 자본주의는 부의 배분 수단으로서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으며, 구조적 불평등과 빈곤에 연루되어 있다. (4) 자본주의 체제의 효과는 경제적 사회적 공학의 절차를 통하여 국가에 의해 교정될 수 있다. 국가는 공공 또는 공동이익의 관리자이다. (5) 국민국가는 경제 사회생활을 규정하는 능력을 갖춘 정치적 통치의 의미 있는 단위이다. 사회민주주의는 1945년 이후부터 점차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윤리적 사회주의: 영국의 사회주의는 기독교 윤리의 보편적 형제애에 기초하여 모든 개인이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원칙으로 사회주의를 추구하였다. 수정주의적 사회주의: 에드워드 번스타인은 폭력적 투쟁이나 혁명이 없이 민주주의 선거를 통하여 사회주의를 구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사회민주주의의 위기: 경제 상황의 변화에 따라 사회민주주의는 위기에 직면해 왔다. 이를테면 1929년 대공황이 국제경제를 마비시킬 때, 정부가 얼마나 어떻게 개입하여 (예: 케인스 공급 위주 정책) 경제를 정상으로 회복할 것인가로 사회주의 정책이 시험을 받는다. 1970년대 1980년대 불황에서 여러 국가에서 정책의 시험을 받았다. 제3의 길: 사회주의 정책에서 성장과 분배에 어떤 비율로 중점을 둘 것인가? 성장 위주 정책은 분배를 약화하고, 분배 위주 정책은 성장을 약화한다. 그 중점을 7 대 3 또는 6 대 4로 할 것인가 타협하는 정책을 제3의 길이라 할 것이다.
TO BE CONTINUED
(d) 국민주의(Nationalism)
(e) 무정부주의(Anarchism)
(f) 파시즘(Fascism)
(g) 형이상학적 관념주의에 대한 반동
(h) 공리주의와 영국의 관념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