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사 연재 18-Continued 4)/ PhD. Hugo W. Kim in USA
문명사 연재 18. 18세기 유럽의 정치철학 (Continued 4)
(e) 독일의 관념철학과 영국의 공리주의
영국의 경험주의(Empiricism)는 지식이 감각적 인식에서 오고 대륙의 합리주의(Rationalism)는 지식을 얻는데 이성의 역할을 중시하였다. 그러나 독일의 관념주의(Idealism)는 1800년 전후로 철학을 새로운 방향으로 진입시켰다. 데이비드 흄은 경험주의자로서 인간의 이해에 관한 질문 (1748)에서 인간 이성이 자연적 잘못을 만들고, 신체가 변하여 감각적 관찰의 일관성을 방해하기 때문에 인간의 인식이 목표물과 같다는데 의문을 가졌다. 이성과 감각 사이에 일어나는 회의적 의심으로 경험주의를 지탱하는 인과관계의 법칙에서 인식의 근거가 희미해졌다. 흄은 이 의심을 해결하기 위하여 미래는 현재를 닮는다는 믿음이 주는 관습이나 습관을 소개하였다. 흄으로부터 암시를 받은 임마누엘 칸트는 선험적(초월적) 개념을 정립하고, 피히테, 셸링, 헤겔에 의해서 관념주의 철학으로 발전하였다. 한편 공리주의(Utilitarianism)는 영국의 제러미 벤담과 제임스 밀 그리고 그의 아들 존 스튜어드 밀에 의해 그 개념이 발전하였다.
임마누엘 칸트 (1724-1804)는 동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경건파로 알려진 루터교도의 부모에게 양육되었다. 그의 양육은 종교적이었으나 칸트는 자신이 독단적 교리주의에 종속되지 않았다. 기본 교육을 마치고 1740년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 들어가 학교에서 요구하는 최소의 신학 과목을 수강하고 철학, 수학, 물리학 공부에 전념하였다. 1746-55 기간에 부모사망 이후 재정적 어려움으로 가정교사로 일하며 대학원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동 대학에서 15년간 강사로 가르치며 1770년 논리학과 형이상학 교수로 임용되어 그의 생애동안 봉직하였다. 그는 많은 철학 분야의 저술을 하였고 1786-88 기간에 대학총장으로 선출되어 봉사하였다. 그는 쾨니히스베르크를 한 번도 떠나지 않았으며 규칙적인 일상생활로 강의와 사유에 전념하였다. 다음은 칸트의 철학사상이다.
***순수이성 비판(1781): 선험적 철학(Transcendental Philosophy): 모든 인간의 인식은 경험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경험에서 창출된 일반적 규칙으로부터 오는 선험적(a priors or Transcendental) 지식은, 이를테면 수학은 모든 경험으로부터 독립된 좋은 예로, 직관을 전제로 한 목표와 인식으로, 직관이 곧 선험적이다. 모든 인간의 인식은 직관(Intuitions)으로 시작하여 개념(Conceptions)을 형성하고 관념(Ideas)에 이르게 된다. 우리의 직관은 현상의 표현이며 우리는 대상의 본성을 인지하는 자신의 형식보다 더 알지 못하므로 감각은 (시간과 공간의 주관적 조건 아래서 타고난 형태의 직관을 통하여) 우리 마음의 지각구조에 의해 모형을 만든다. 감각의 개념은 물 자체(Things-in-Themselves)의 혼동된 표현이며 실제 존재의 변조이다. 순수이성의 일반적 문제는 종합적 판단이 순수수학이나 순수자연과학에서와같이 어떻게 가능한가이다, 왜냐하면 순수이성은 선험적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인식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감각적 직관이나 경험적 개념은 우리의 모든 (선험적 및 경험적) 지식의 요소를 구성한다. 선험적(priors) 지식은 경험 이전에 마음속에 존재하는 감각적 직관의 순수한 형태이므로 경험적 내용으로부터 독립적이다. 그러나 후천적인 경험적(posteriors) 지식은 우리가 감각으로부터 받은 인상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모든 현상의 경험적 내용에 기초한다. 칸트는 논리를 일반적-특수적 논리로 구분하고, 일반적 논리는 모든 내용과 인식이 추상적이므로 선험적 논리라 부르고 이를 분석법과 변증법으로 구분하였다.
선험적 분석법(Transcendental Analytic): 모든 감각적 직관은 수집되어 이해의 순수개념의 요소로 통합된다(다양성의 통합). 이해의 순수개념은 직관의 대상에 선험적 지식을 적용하며, 이는 모든 가능한 판단의 논리적 기능이다. 판단을 가져오는 요소는 양, 질, 관계, 형식을 포함한다. 칸트는 분석적 개념을 위한 인식의 일반적 논리 형태를 적용하여 그 범주(Categories)를 12개(4개의 대분류 속에 각각 3개의 요소를 포함)로 구분하고 양(단일, 다수, 통합), 질(실체, 배실재, 제한), 관계(선천적 생존, 인과관계와 의존, 공동체), 형식(가능성, 존재, 필요성)으로 구분하였다. 지식은 범주에 의해서 판단 혹은 관념으로 변화하는 지각이며, 감각의 대상에 범주를 적용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관계에서 판단과 결론을 가져오는) 이해의 본래 형태이다. 분석적 판단은 모순의 원리에 기초한다. 우리는 범주만으로 사물의 가능성을 인지할 수 없으며, 항상 직관을 가지고 이해의 순수개념의 객관적 실재를 만들어야 한다. 범주의 한계 안의 내부적 직관뿐만 아니라 한계 밖의 외부적 직관까지를 필요로 한다.
선험적 변증법(Transcendental Dialectic): 순수이성은 선험적 원리로부터 오는 지식의 기능이며 우리에게 심리학, 천문학, 신학의 선험적 원리의 관념을 제시한다. 변증법은 명제(Thesis)와 반명제(Antithesis)를 사용하여 이들 간의 모순되는 주장을 화합하는 합명제(Synthesis)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순수이성의 변증법은 선험적 분석에서 이미 증명된 진리 (경험의 한계를 넘어선 모든 추론은 불합리하고 근거가 없다)를 확인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이성은 이들 한계를 뛰어넘는 자연적 경향을 보였고, 선험적 관념은 이성의 자연적 자산이라는 중요한 교훈을 가르친다. 인간 이성은 개념(Ideas)과 이상(Ideals)을 가졌다. 정신은 물질이 아니며 우리가 개념을 통하여 물질을 알기 때문에, 순수이성 체계에서 물질주의는 불가능하다.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의 개념은 단순한 생각이다. 우리가 모르는 존재에 대한 사물의 실재에 관한 인식은 불가능하다. 초월적 존재의 객관적 실재는 순수이성에 의해 증명될 수도 아니 될 수도 있다.
***실천이성비판(1788): (1) 도덕적 의식은 경험으로부터가 아닌 범주와 같이 타고난 심리적 구조에서 온다. 실천적 원리는 항상 이성의 산물이며 무조건적 도덕률이 인간의 의지를 결정한다. (2) 의지의 자유: 만일 인간이 도덕률을 따르면, 그는 선험적으로 자유롭다. 만일 인간이 자유의지로 독립적으로 행동하면 도덕률은 그의 의지의 기본원칙이다. (3) 도덕률은 세상에 최고의 선을 가져오는 의무를 요구한다. 그러나 최고선의 개념은 그 최고의 의미가 최상인가 완전성 인가 모호하다. 순수이성의 실질적 임무는 최고선을 증진하는 데 있다.
***판단력 비판(1790): 심미적 판단에서 네 가지 기쁨을 소개한다. 기분이 좋음(Agreeable)은 주관적 경향에 따른 감각적 판단이다. 아름다움 (Beautiful)은 인식이나 논리가 아니며 주관적 느낌이나 여건에 따른 심미적인 것으로 감정으로부터 독립적이다. 숭고한(Sublime) 기쁨은 범주에 의하면 질적으로 독립적이며, 양적으로 보편적이고, 관계는 주관적 종말이며, 형식은 필요성이다. 선(Good)은 도덕적인 것으로 순수한 주관적 판단이며 도덕적 법에 순응한다. 목적론적 판단은 목적을 찾는 원인을 조사하며, 목적과 수단은 상호적이다. 자연적 목적론은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으나 종교와 도덕의 관계에서 긍정적 역할을 한다.
영구적 평화(1795): 가까이 사는 인간 사이에 자연적 상태는 평화가 아닌 전쟁상태로서 항상 열린 증오와 지속하는 위험 속에 있다. 항구적 평화를 보장하기 위하여 칸트는 세 가지 수단을 제시하였다. 첫째 사람들은 외부위협에 군사적으로 맞서기 위하여 이에 대비하는 국가를 형성해야 한다. 둘째 국제적 권리의 관념은 분리되고, 독립적이며, 인접한 국가들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면, 그 상황이 전쟁상태에 있다고 해도 그들이 일반적 왕국으로 결합한 우세한 (독재) 권력에 의해 지배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다. 셋째 독재정치는 모든 권력을 해친다. (살아있는) 경쟁하는 권력의 균형은 상호이해와 평화로 유도되는 문명의 성장과 인간의 점진적 발전으로 생산되고 보장된다. 셋째 무역의 정신은 전쟁과 공존하지 못하고 이러한 정신이 조만간 모든 사람을 지배한다. 재정적 힘은 국가들이 평화의 고귀한 동기를 추구하도록 강요하면서 최상의 신뢰를 한다. 세계 어디서나 전쟁이 발발할 위협이 있는 곳에서 무역은, 이 목적을 위하여 영구적으로 동맹을 맺은 것처럼, 중재를 통하여 전쟁을 방지하려고 노력한다.
칸트는 도덕과 정치 사이의 불일치가 항구적 평화의 관계에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고 본다. 도덕은 그 자체에서 현실적이며 완전히 무조건 법에 묶여있고 이에 따라 행동해야 하므로, 응용된 권리와 도덕 그리고 권리의 이론적 교리로서 정치와 분쟁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 사이에 만일 분쟁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궁극적 목적을 추구하기 위하여 이성을 기대한다. 그러나 인간은 항구적 평화를 위해 요구되는 것을 행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결합한 의지의 집단적 단일화는 문명한 사회가 한 개의 전체가 되기를 요구하며, 만일 일반적 의지가 헌법을 수립한다면 이 강요가 공공의 권리를 위한 기초를 마련한다. 지금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한다. 도덕적 정치인이 정치원칙을 도덕과 일치시키거나, 정치적 도덕가가 도덕이 정치인들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하는 것이다. 실천적 철학이 조화를 가져오기 위하여 정치적 도덕가들은 도덕 정치가가 바로 멈추도록 하면, 그의 주의가 일반적 법이 된다. 따라서 칸트는 두 가지 필수의 원칙을 강조한다. 타인의 권리에 영향을 주는 모든 행위는, 만일 그들의 주의가 공공성과 일치하지 않으면, 옳지 못하고, 만일 공공성을 요구하는 모든 주의가 (그들의 목적에 실패하지 않게 하려고) 모두 정치가와 도덕과 (공통선을 위하여) 합의해야 한다.
요한 피히테(1762-1814)는 예나대학을 거쳐 라이프치히대학을 졸업하고 1791년 칸트철학을 알게 되었다. 1792년 예나대학 교수가 되었고 1798년 철학 잡지에 발표한 “신의 세계지배에 대한 우리의 신앙 근거”라는 논문으로 무신론이란 의혹을 받아 예나대학에서 물러났다. 그 후 베를린에서 시국 문제에도 활발한 발언을 하였고, 나폴레옹이 프러시아를 정복할 때 그의 연설 독일 국민에게 고함(1807-08)은 독일 민족주의를 옹호하는 저술로 유명하다. 피히테는 칸트에 이어 독일 관념론을 대표하는 철학자로서 주요 저술은 자연철학의 관념 (1797), 선험적 관념철학의 체계 (1800), 종교의 철학(1804) 등이 있다.
프리드리히 셸링(1775-1854)은 뷔르템베르크의 신학교에 조기 입학하여 헤겔과 횔덜린과 같은 방을 사용하며 좋은 친구가 되었다. 셸링의 관심은 점차 신학으로부터 철학으로 바뀌었고 1795년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한편 그는 칸트와 피히테를 공부하기 시작하여 크게 영향을 받았다. 1798- 1803 기간에 예나대학에서 강의하고, 1803-06 기간에 신설된 뷔르츠부르크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뮌헨에서 정부 관리로 취직하여 1806-41 기간에 공직에 있으면서 대학에서 강의하고 저술 활동을 하였다. 1841년부터 프러시아 민관위원 및 베를린 학술원 회원으로 베를린에서 활동하였다. 저술에는 지식의 과학(1794), 자연적 권리의 기초(1796-7), 윤리의 체계 (1798) 등이 있다.
게오르크 헤겔(1770-1831)은 뷔르츠부르크 태생으로 1778-92 기간에 튀빙겐 신학교에서 수학하고 신학 증서를 받았다. 그 후 베를린과 프랑크푸르트에서 6년간 가정교사를 하였다. 그는 1805년 예나대학의 객원 교수로 채용되었고 1816년 뉘른베르크 김나지움 교장직을 받아들이고, 1816년 하이델베르크의 교수가 되면서 같은 해 베를린대학 피히테 후임 교수로 초빙되어 강의와 저술로 여생을 보냈다. 다음에서 헤겔의 저술이다.
정신 현상학(1807): 헤겔은 절대적 지각, 의식, 자아의식, 이성, 정신, 종교로부터 절대적 지식에 이르는 변증법적 과정을 통하여 절대적 관념주의(Absolute Idealism) 개념을 발전시켰으며 실존주의, 공산주의, 파시즘, 신의 죽음, 허무주의 등의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의식은 주관적 생각과 객관적 존재를 품는 정신의 즉각적인 존재이다. 만일 대상이 충분히 나타나고 직관과 객관의 구별이 사라지면, 절대적인 것은 이론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의 통합으로 형성된다. 이처럼 의식은 내부의 자아를 외부의 실재에 적응하며, 그 관계는 감각-인지-이해를 통하여 탐색 된다. 감각의 확실성은 진실과 즉각적인 지식 사이에서 타고난 분쟁에 직면한다. 지식은 변화하는 시간과 공간에 연루되어 일반성에 의해 이해될 수 있다. 물 자체(Thing-in-Itself)가 대상의 단일성이나 일반성이며 다양하고 독립적인 특성을 가진 존재이므로, 사물은 그 자체에 대칭적 진실이 있다.
바꾸어 말하면, 의식적 자아는 공동의 매체가 되어, 그 사물의 모든 감각적 국면이 단일성 또는 조건 없는 절대적 일반성으로 통합되고, 사물의 본성은 이해의 본성이 되는 절대 관념(Absolute Idea)이다. 자아의식은 다른 자아의 존재를 인정한다 - 순수하게 다르지 않은 “나”는 최초 즉각적인 대상이며, 욕망의 만족은 자아의식이 그 자체 속으로 반응하는 것이고, 이 확실성의 진실은 자아의식의 복제이다. 이성은 최초 두 단계의 종합을 가져온다. 헤겔은 인간 의식의 최하 수준으로 시작하여 변증법적으로 작업하며 인간 마음이 절대적 견해를 달성하여 무한한 자아 의식적 정신의 수단이 되고, 신은 정신이기 때문에 종교가 이를 품어 결국에는 현상학의 절대 지식(Absolute Knowledge)에 도달한다.
논리학의 과학(1812-16): 헤겔의 논리학은 세 가지 교리에 중점을 두고 있다. (1) 존재(Being): 절대성은 모든 합으로서 존재한다. 물 자체가 형태나 내용이 없어 불명확하면 그것은 무존재이다. 존재와 무존재의 진실은 두 개의 단일화로, 대치되는 두 요소가 하나로 흡수되어 명확한 존재가 된다. (2) 본질(Essence)은 동일성의 형태로서 자아 속으로의 반응이며, 또한 다양성과 다중성과 같이 다른 특성을 포함하는 타아 속으로의 반응이다. 동일성과 상이성이 통합하여 그 통합성으로서 존재의 종합적 본질이 되면서, 내용과 형태 그리고 (실질성, 인과성, 상호성) 관계의 실존에 외관적 축소가 있게 된다. (3) 일반개념(Notion)은 완전한 구체적 특성을 가지는 모든 인생의 원칙이다. 이성은 존재와 본질에 연루되기 때문에 이 두 요소는 생각의 단일화로 결합한다. 일반개념은 주관성, 객관성, (주객융합의) 절대적 진리로 구분된다.
역사의 철학(1837)은 헤겔 사후에 그의 아들이 출간하여, 역사연구의 세 가지 방법을 제시하였다. (1) 원작의 역사 (Original): 역사가들은 세계적으로 대표적 지식인들의 영역에 무엇을 전달할 것인가? 원작의 역사에서 외부현상이 내부개념으로 변화된다. (2) 반응하는 역사 (Reflective): 역사를 대표하는 형태는 시간제한으로 관련된 것에 한정되지 아니하나 그 정신은 현재를 초월하며 일반적, 실용적, 비판적, 단편적 역사를 포함한다. (3) 철학적 역사(Philosophical): 이성이 세계를 지배하고, 세계 최후의 설계를 가르치고, 세계역사의 진로를 안내한다. 헤겔은 정치형태에서 제1은 독재정치며, 제2는 민주정치와 귀족정치이고, 제3은 군주정치라고 하였다. 그는 세계역사를 4개 세계, 즉 고대 동양의 세계, 그리스 세계, 로마세계, 게르만 세계로 구분하였다.
헤겔의 유산: 헤겔의 공헌은 첫째 칸트의 인식론의 선험적 변증법을 역사발전의 단계에 적용하여 역사가 정반합의 작용으로 새롭게 발전한다고 보았다. 둘째 칸트의 정치철학은 18세기에 풍미한 개인주의나 세계주의와 결별하고 19세기에 풍미하는 민족주의에 기초한 정치철학으로 발전하였고, 변증법적 물질주의로 변형하여 마르크스주의(Marxism)가 출현하였다.
제러미 벤담(1748-1832)은 런던 태생으로 옥스퍼드대학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1769년에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개업은 하지 않고 철학에 전념하였다. 철학자이기보다 철학적 개혁가로서 벤담의 비판은 날카로웠다. 그의 저술 도덕 및 입법의 원리 서설(1789)에서 효용의 원리, 인간 행위의 분석, 처벌 규정의 세 가지 이슈를 다루었다. 인간의 본성은 (육체적, 정치적, 도덕적, 종교적으로) 기쁨을 최대화하고 고통을 최소화하는 데 있으므로, 효용의 원리는 옳고 그름의 외부적 기준으로 충분한 기초가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Utilitarianism)를 창안하였다. 이를 계량적으로 접근함에서, 목적함수보다 제약조건이 외부조건과(다른 감수성과 동기의 개인차로 인해) 복잡성이 야기 되었다. 그는 모든 처벌은 악이며, 고통의 위협이 기쁨의 약속보다 효과적이고, 가벼운 처벌이 오히려 범죄를 적게 하는 동기를 부여한다고 생각하였다. 벤담은 평등은 안보에 종속되므로, 평등을 향한 급진적 운동이 생명과 재산의 보장하는 안보를 위협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제임스 밀(1773-1836)은 스코틀랜드 태생으로 에든버러대학을 마치고, 계속 수학하여 스코틀랜드교회의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런던에 이주하여 벤담의 제자가 되고 공리주의 학교의 비서관이 되어 저술 활동을 하였다. 공리주의자들은 정치에서 군주의 영향을 최소화하는 급진적 개혁을 추구하였다. 그는 1825년 런던대학을 창립하는 주역을 하였다. 그의 저술은 정치경제학의 요소 (1821) 와 인간 정신 현상 분석(1829)이 있다. 그의 아들 존 스튜어트 밀은 공리주의 이론과 사상을 정립하고 발전시켰다.
(문명사 연재 18. 18세기 유럽의 정치철학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