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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사 연재 16~계속 4/ 재미 원로학자 Hugo W. Kim

양곡(陽谷) 2023. 7. 28. 09:20

문명사 연재 16. 18세기 유럽의 정치와 종교 (Continued 4)

(e)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시대 (1799-1815)

나폴레옹(1769-1821)은 코르시카에서 태어나 1785년 프랑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포병 소위로 임관되었다. 그는 청년 장교로서 머리가 현명하고 가슴이 따뜻하며 신체에 활력이 넘쳤고, 그의 연설은 병사들을 설복하고 그의 결심은 신속 정확하였으며 그의 전략 전술은 적보다 우수하였다. 그는 역사 철학 법률 전략 경영 등에 관한 광범위한 독서로 넓고 깊은 지식을 갖춘 탁월한 지도자였다. 나폴레옹은 1795년 왕당파의 반란을 포병으로 진압하여 장군으로 진급하고 출범하는 총재정부를 구하였다. 그는 1796년 이탈리아 방면군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를 공략하고 승리하여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1798년 이집트 방면군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임무 수행 중 1799년 복귀하여 파리의 수비대장에 임명되었다.

프랑스 공화국이 무정부주의자들과 외세와 연합한 단체에 의해 위협을 받았고, 내부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프랑스를 방어하기 위하여 총재정부(Directory)는 나폴레옹을 선택하였다. 외부 위협: 영국은 해양 우위에 기초하여 상업제국을 추구하고, 러시아는 폴란드와 터키를 압박하여 영토 확장전략을 취하며, 프러시아는 영토를 통합하여 북부 독일에서 지도적 지위를 추구하고, 오스트리아는 프러시아와 러시아가 상승하고 있어 미약하게 공격적이었으나 프러시아와 경쟁하여 제패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는 유럽 국가들과 전쟁을 하여, 나폴레옹은 외교 관계에서 전쟁이나 평화를 선택하는 처지에 있었다. 그는 일차적으로 평화를 선택하고 다음 단계에서 전쟁하였다. 내부 위협: 프랑스 사회의 모든 면에서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였다. 농부들은 만일 부르봉 왕조가 되돌아오면 그들이 사들인 토지 소유권이 폐기될까 걱정이었다. 상인들과 제조업자들은 그들의 번영이 봉쇄된 항구, 파괴된 도로, 도로의 강도들에 의하여 위협받고 있는 것을 보았다. 국고는 비어있고 종교는 항상 대립하고 공교육은 교회의 헌신 없이 망가지고, 자유로운 이혼으로 가족이 흔들리고, 회의적인 혁명의 미래로 애국심은 죽어갔다. 나폴레옹은 내부투쟁을 치유하고 파당을 중립화하여 적절한 타협으로 혁명을 끝내기를 원하였다.

나폴레옹의 등장과 집정관 (1799-1804): 1799년 12월 나폴레옹이 장악한 군대와 테르미도르파 의원의 지지로 500인회(하원)는 헌법을 폐기하고 3명의 집정관(Councils)이 행정 권력을 장악하는 수정된 헌법을 가결하였다. 입법부는 4개 원(Houses)으로 구성하고 제1원 국가위원회는 25명으로 국가수반이 임명하며 새로운 법을 제안한다. 제2원 보수 상원은 80명(40세 이상 유자격)으로 제1 집정관이 임명하고 의원임기는 종신이며 법률을 제안 또는 폐기를 결정하고 제3원과 제4원의 의원을 임명한다. 제3원 호민관은 100명으로 제1원 국가위원회가 제안한 법률을 심의하여 의견을 제안한다. 제4원 입법원은 300명으로 제안된 법률을 표결한다. 21세 이상 모든 시민은 그들 수의 1/10 만큼 공동체 명사 의원을 선출하고, 명사 의원 1/10 만큼 행정구의원을 선출하며, 행정구의원 1/10 만큼 전국의원을 선출한다. 모든 관리는 선출된 의원 중에서 중앙정부가 임명한다. 3명의 집정관 가운데 제1 집정관(나폴레옹)은 정치 외교 군사 업무를, 제2 집정관은 법무 업무, 제3 집정관은 재무 업무를 맡는다.

나폴레옹은 새로운 헌법이 대의 정부의 원칙, 신성한 재산권, 평등, 자유 위에 제정되고, 강력하고 안정된 정부는 시민의 권리와 국가의 이익을 보장할 수 있다고 믿었다. 새로운 헌법이 광범위한 정치 참여, 농부와 자본가들의 재산권 보장, 봉건 잡부금과 십일조 철폐 등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세 불이익 집단에서 불평불만이 나왔다. [자코뱅] 새 헌법은 혁명이 부르주아에 항복하는 것이다. [가톨릭교] 새 헌법은 교회 재산 몰수를 확인하는 것이다. [왕당파] 새 헌법은 나폴레옹의 입장을 강화하여 부르봉 왕조의 복원을 어렵게 만든다. 왕당파가 새로운 정권의 수용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는 대부분 신문을 장악하여, 나폴레옹은 73개 신문 중 60개의 활동을 금지하여 언론인 작가 철학자들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공격이라 비난하였다. 한편 농민들은 새 헌법이 자코뱅을 억압하기 때문에 이를 지지하였고, 무산대중은 혁명에 믿음을 잃었으나 전쟁영웅으로부터 희망을 품었으며, 자본가 계층은 재산권과 기업의 자유를 보장하는 새로운 헌법을 수용하였다. 새 헌법은 1799년 12월 24일 국민투표에서 3,011,107 대 1,562표로 압승하고, 나폴레옹은 다음 해 2월 취임하였다.

나폴레옹은 취임 후 영국의 조지 3세와 오스트리아의 프랜시스 2세에게 평화의 서신을 보냈으나 부르봉 왕가의 회생을 전제로 하여 군사행동이 불가피하였다. 그는 4만 병력으로 알프스를 넘어 북부 이탈리아로 진격하고 24,000 병력으로 오스트리아군 31,000과 1800년 6월 14일 마렝고 전투에서 대승하여 적군은 이탈리아 북서부에서 철수하고 나폴레옹도 파리로 돌아와 그의 정치적 입지가 강화되었다. 휴전협정을 무시하고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 지역에 80,000 병력을 투입하자 투스카니아에서 격퇴하였다. 나폴레옹은 보병 41,990 기병 14,131로 1800년 12월 뮌헨 부근에서 오스트리아 보병 46,130과 포병 14,131과 전투에서 승리하고 휴전하였다.

대내적으로 나폴레옹에 대한 암살음모가 적발되어 처형하거나 추방하였다. 나폴레옹은 화합을 위하여 49,000명의 추방자 귀국을 허용하고 1801년 2월에 오스트리아와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오스트리아는 벨기에, 룩셈부르크, 라인강 서편을 프랑스 영토로 인정하고 여타 전쟁으로 취득한 권리를 확인하였다. 1802년 3월에 프랑스는 영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이집트를 터키에 양도하고 영국은 몰타를 기사단에 양도하고 프랑스군은 이탈리아 중부와 남부에서 철수하였다. 또한, 프러시아, 바바리아, 러시아, 터키와 평화조약을 체결하여 내부 혼란과 외부 위협을 극복하였다.

나폴레옹은 1800년 8월 4명의 법관을 임명하고 법을 정비토록 하여 1804년 나폴레옹 법전을 완성하였다. 그는 1801년 7월 로마교회와 정교조약 (Concordat)에 서명하여 가톨릭교가 프랑스 국민 대다수의 종교임(국교가 아님)을 인정하고 국가는 모든 국민(개신교와 유대교 포함)에게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며 교회는 국가가 몰수한 토지에 대한 상환을 철회하고 국가는 성직자들에게 보수를 지급하며, 성직자는 임명 시에 국가에 대한 봉사의 선서를 하는 데 동의하였다. 프랑스는 1802-03 기간에 운하를 건설 개통하고 도로를 보수하며 항만을 파내고, 세금은 조정하며, 정부 계약으로 산업을 촉진하고, 영국의 봉쇄해제로 무역을 확대하며, 정교조약으로 교회와 화해하고, 교육제도를 개선하며 필요한 법률을 제정하여, 파리는 유럽 여행자들의 수도가 되었다. 국민이 안정과 번영에 성원을 보냈다.

새로운 프랑스 제국 (1804-07): 1804년 12월 2일 나폴레옹은 파리의 노트르담에서 교황 파이어스 7세에 의해 황제가 되는 대관식이 진행될 때에 그는 왕관을 스스로 머리에 얹었고, 영국 스웨덴 러시아를 제외한 유럽 국가들이 그를 프랑스 왕으로 승인하였다. 프랑스의 확장에 위협을 느낀 오스트리아는 1805년 6월 영국 러시아 스웨덴 프러시아와 함께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자 나폴레옹은 라인군, 이탈리아군, 나폴레옹 군의 세 집단 군을 편성하였다. 그는 육지에서 오스트리아-러시아군과 바다에서 영국 함대와 두 개의 전선에 직면하였다. 프랑스 해군의 주력은 브리타니의 브레스트와 지중해의 토울론에 있었고, 동맹인 스페인 함대는 카디스와 페르롤에 있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스페인 해군이 서인도 함대와 합류하여 유럽으로 돌아와 영국을 침공하는 계획을 수립하였으나 해군의 작전에 차질이 생겨 보우론에 대기한 나폴레옹의 원정군은 1805년 8월 독일로 진격하였다. 한편 10월 영국 함대(27척 전함과 17,000 수병)는 넬슨 제독의 지휘하에 프랑스-스페인 함대(33척 전함과 30,000 수병)와 트라팔가르에서 교전하여 결정적으로 승리하고 21척 전함을 나포하였다.

나폴레옹의 15만 대군은 하루 30km를 행군하여 라인강을 건너 프러시아에 진입하여 1805년 10월 울름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 72,000을 만나 크게 이기고 30,000을 생포하였다. 같은 해 12월 72,000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러시아군 92,000과 만나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크게 이기고 12,000을 생포하였다. 1805년 12월 프레스부르크 조약에서 오스트리아는 프랑스가 점령한 땅을 프러시아에 양도하며 4천만 프랑의 배상금을 내고, 러시아군에게 안전한 복귀를 허용하였다.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이 해체되고 프랑스가 완충지대로서 라인연방을 구성하여 프랑스 제국은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라인 접경국가, 제네바, 교황국 이북의 이탈리아를 포함하였다.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윌리엄 3세는 프랑스 보호국인 라인연방에 거부감으로 러시아, 작센, 스웨덴, 영국과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을 구축하였다. 프러시아는 프랑스군이 라인강 서쪽으로 철수하도록 요구하며 1806년 9월 140,000 병력으로 선전포고하였다. 프랑스는 130,000 병력으로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두 번 크게 승리하여 6주 안에 프러시아를 정복하고 1806년 11월 베를린에 입성하여 베를린 칙령을 선포하고, 영국과 그 식민지로부터 오는 어떤 선박도 프랑스 제국의 항구에 진입을 금지하는 대륙봉쇄령(Continental System)을 발표하였다. 산업혁명이 진행 중인 영국에 유럽대륙의 교역을 금지하여 경제적으로 고립시키려는 전략적 의도였다.

러시아는 영국의 동맹으로 영국 상품이 단치히에 하적되어 프러시아군이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 국경으로 수송하였다. 러시아군 80,000은 비스와강 서안에서 프랑스군이 폴란드 국경에 진입하는 것에 대비하고 있었다. 폴란드로 진입한 프랑스군 43,000은 1807년 2월 67,000 러시아-프러시아 연합군과 프로이시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같은 해 6월 프랑스는 70,000 병력으로 러시아군 120,000과 프리에들란트 전투에서 대승하고 나폴레옹과 알렉산더 1세는 7월에 틸지트 조약에 서명하였다. 러시아는 터키와 원하는 관계를 수립하고, 프랑스는 달마티아 해안과 이오니아 섬들을 취하며, 러시아는 핀란드를 취하고 대륙봉쇄 체제에 들어오며, 단치히는 프랑스 수비대가 관장하는 자유시로 유지한다. 프러시아는 엘베강 서부에 웨스트팔리아 왕국을 수립하고 일부 영토를 작센과 러시아에 양도하며 병력 40,000 미만을 유지하고 배상금 1억 프랑을 낸다. 프러시아가 지배하는 폴란드는 실제로 프랑스 보호령이 되었다. 1807년 8월에 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는 영국에 전쟁을 선포하고 영국이 코펜하겐에 함포사격을 하여 덴마크는 대륙봉쇄 체제에 가입하였다. 터키의 셀림 3세가 사망한 전후로 프랑스와 터키 동맹이 약화하면서, 나폴레옹은 이베리아반도를 해상봉쇄하여 영국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 무역을 방해하려고 시도하였다.

스페인 전쟁 및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1807-11): 영국은 포르투갈의 브라질 식민지가 새로운 시장으로 가치가 있다고 보았고 리스본의 항만 시설은 영국해군이 지중해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토울론이나 마르세유 봉쇄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주 사용하였다. 1807년 7월 나폴레옹은 영국 상품에 대해 항구를 봉쇄하라고 리스본에 통보하였으나 영국과 동맹인 관계로 거절하였다. 프랑스와 스페인은 포르투갈과 그 영토를 나누기로 비밀협정을 체결하였다. 그해 10월 프랑스군 20,000은 베이요네에서 스페인을 거쳐 11월 리스본에 입성하고 브라질행 선박을 나포하였다. 나폴레옹은 포르투갈에 1억 프랑의 배상금을 부과하고, 뮈라의 지휘하에 3개 군을 스페인으로 보내 마드리드 인근 전략거점을 점령하였다. 수상 고도이는 프랑스군이 스페인 요새로 진입하도록 도왔다. 1808년 3월 폭동이 일어나 찰스 4세를 전복하고 그의 아들 페르디난드 7세가 계승하였으나 나폴레옹은 페르디난드를 투옥하고 형 조지프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스페인을 병합하려는 프랑스 의도를 간파한 스페인 시민들은 분개하여 모든 주에서 폭동을 일으켜 애국심과 증오심은 스페인의 저항정신을 불러 왔다.

마드리드에 계엄이 선포된 가운데 친프랑스 지사 3명이 암살되고, 세 개의 주 정부가 애국 군대를 만들어 전국적으로 확산하였고, 세빌의 군사정부는 영국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스페인의 10만 병력은 지방에 산재해 작전 준비가 없었다. 나폴레옹의 12만 병력은 전쟁에 경험이 없는 복합적인 부대로 응집력이 부족하였고 지형은 효과적인 작전을 어렵게 하여 초기 작전은 실패를 가져왔다. 1808년 7월 듀퐁의 23,000 병력이 코르도바로 진격하여 스페인 30,000 병력과 대치하고, 바일렌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함정에 빠져 식량난으로 18,000명이 항복하였다. 영국군 13,500이 아서 웨슬리 지휘로 포르투갈에 도착하여 5,000명이 증원되고 8월에 프랑스군과 대치하여, 신트라 회합으로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에 항복한 26,000 프랑스군이 전투 없이 퇴각하도록 허용하였다. 영국군은 15,000명이 추가 증원되었다. 포르투갈은 해방되어 영국과 동맹을 복원하였고 영국은 스페인 전쟁에 규모의 개입을 결정하였다. 나폴레옹은 10월 러시아의 알렉산더 1세와 엘르푸르트 회합에서 틸지트 조약을 연장하였고, 그는 프랑스와 러시아와의 동맹이, 프랑스-스페인 전쟁 기간에,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하는 것을 억제해 줄 것이라 기대하였다.

바일렌과 신트라는 나폴레옹의 자존심과 국제적 평판에 손상을 주었고 이베리아반도를 영국의 동맹으로 남겨두는 것은 받아드릴 수가 없었다. 나폴레옹은 15만 대군을 동원하여 피레네를 넘어 조지프의 군대 6.5만과 합류하여 1808년 11월 마드리드에 입성하였다. 1809년 1월까지 영국군을 축출하고, 소울트 원수에게 전후처리를 맡기고 파리로 귀환하였다. 그러나 스페인은 영국의 지원을 받으면서 게릴라전으로 완강히 저항하였다. 스페인 전쟁은 프랑스가 병력 20만을 배치하여 매년 4만의 손실을 가져왔다.

나폴레옹 부재중 파리에서 반정 음모가 있어 반역자를 색출 처형하였다.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힘든 평화를 탈피하려고 전쟁을 준비해 왔다. 나폴레옹은 스페인에서 2개 사단을 철수하고 10만을 징집하며 라인연방으로부터 10만을 받아 31만 병력을 동원하였다. 1809년 4월 오스트리아 칼 루드비그가 20만 병력으로 바바리아를 공략하고 영국은 오스트리아와 제5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였다. 그해 7월 나폴레옹의 16.2만 병력이 오스트리아 찰스 대공의 13.6만 병력과 대치하여 쌍방이 역사상 최악의 손실을 내고 평화를 찾았다. 1809년 10월 14일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비엔나 근교 왕궁에서 쇤브룬 조약에 서명하고 영토할양과 8500만 프랑의 배상을 받았다. 오스트리아는 파리 대사를 역임한 클레멘스 메테르니히(1773- 1859)를 국무장관으로 임명하여 프랑스와 동맹전략을 취하였다. 그는 1810년 3월 조제핀과 이혼한 나폴레옹과 오스트리아 공주 마리 루이즈와 결혼을 주선하여 왕자 나폴레옹 2세의 탄생으로 결속을 강화하였다.

국민주의와 정치발전 (1789-1812): 나폴레옹의 대륙봉쇄 체제는 영국경제를 파괴하려는 의도였으나 문제를 초래하였다. (1) 무역 금지는 수출업자와 수입업자를 함께 해치고 동맹국들은 그들의 무역을 통제하는 프랑스의 주도권에 불만을 느끼게 되어 그 체제가 오래가지 못했다. (2) 영국은 라틴아메리카와 같은 새로운 시장을 가지고 있어 어떤 사람은 영국 상품을 밀수하는 사람들에게 연결하고 부패 관료와 결탁한다. (3) 프랑스의 정복에 대한 분노는 애국심과 국민주의에 기초한 대중의 저항을 창출한다. 다른 한편 프랑스혁명 기간에 왕조가 아닌 국가를 위한 새로운 국민군대가 창설되어 현대 국민주의가 출현하는 실마리가 되었다. 국민주의는 공통된 언어, 종교, 국가적 상징에 기초한 사람들의 유일한 문화적 동일성을 포함하며 우애와 형제애를 강조한다. (4) 정치 군사적 목적을 위하여 경제활동을 통제하는 것은 단기적 성과를 기대할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 그 목적을 달성하기가 어렵다. 경제활동은 개인의 이윤추구 동기에 기초한 자유로운 선택으로 생산-소비-분배가 이루어진다. 정부의 시장개입은 생산성을 저해하여 악순환을 초래하기 때문에 장기간 지속할 수 없다. 다음에서 프랑스혁명이 각국의 정치발전에 미친 영향을 살펴본다.

영국은 나폴레옹 전쟁 기간에 대프랑스 동맹에 지속해서 참가하여 승전국이 되었다. 특히 1805년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격파하여 제해권을 장악하고, 이로 인하여 나폴레옹이 영국 침략을 포기하고 대륙봉쇄 체제로 전환하여 영국에 실업과 불황을 가져왔다. 영국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지원하여 프랑스는 양면 전쟁으로 군사력을 분산하였다. 독일은 250여 국가의 연방으로 남부는 가톨릭 오스트리아가 북부는 개신교 프러시아가 지배하였다. 오스트리아는 테레사 사후 아들 조지프 2세가 10여 년간 통치하며 농노를 해방하고 신교를 허용하였다. 프란시스 2세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3개의 큰 전투, 즉 1800년 마렝고 전투, 1805년 아우스터리츠 전투, 1809년 바그람전투 등에서 패하여 대륙봉쇄 체제에 가입하였고 메테르니히의 친화 정책으로 공주 마리가 나폴레옹과 혼인하여 왕자를 출생하고 프랑스 관계가 강화되었다. 프러시아는 프랑스와 전쟁으로 강력한 육군이 탄생 하였다.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을 주도하였으나 예나-아우어슈테드 전투에서 대패하였고, 제5차 대프랑스 동맹에서 틸지트 조약으로 영토를 잃고 거액의 배상금을 냈다.

러시아는 나폴레옹 전쟁 기간에 일시적으로 프랑스와 동맹하였으나, 오토만 터키와 이란 카자르 왕조와 전쟁은 동맹을 위태롭게 하였다. 러시아는 카자르와 전쟁을 통하여 오늘날 다게스탄과 조지아 전체와 아제르바이잔의 대부분, 아르메니아 북부 일부분을 점령하여 구소련 국경의 기반을 닦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전쟁들을 통해 러시아 제국은 나폴레옹 전쟁 종전 당시 유럽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보유한 국가가 되었다. 포르투갈은 영국과 동맹으로 영국인이 공장을 관리하고 상품을 팔았다. 프랑스가 포르투갈을 침공하도록 스페인이 합세할 때, 왕족들은 영국 함선으로 브라질에 피하였다. 프랑스가 스페인을 침공하여 병합하려는 의도를 간파한 국민이 애국심과 적개심으로 프랑스에 저항하고 영국의 지원을 받아 게릴라전을 전개하여, 프랑스군 20만이 상시 주둔하여 동서 양면 전으로 프랑스 군사력을 분산시켰다. 이탈리아 북부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 남부는 스페인의 부르봉이, 중부는 교황 국가가 지배하고, 그 외에 베네치아나 제노아는 독립 국가였다. 1796년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방면군사령관으로 롬바르디를 공략하여 북부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축출하고, 1808년 교황국을 이탈리아 왕국(반도 북부)에 병합하였다.

러시아 침공과 나폴레옹의 몰락 (1811-15): 1807년 틸지트 조약에서 나폴레옹과 알렉산더의 평화와 우의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에는 근본적 이해충돌이 존재하였다. (1) 알렉산더는 콘스탄티노플과 발칸 제국을 영유하기를 원하였으나, 나폴레옹은 지중해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허용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2) 나폴레옹은 틸지트 조약에서 프러시아 왕국으로부터 양도받은 폴란드 땅에 바르샤바대공국을 세웠으며, 이는 프랑스가 러시아 국경으로 전진해 가는 것이었다. 의회를 가진 대공국이 프랑스와 동맹하는 것은 러시아에 적대적이다. (3) 대륙봉쇄 체제는 러시아의 경제를 침체케 하였다. 러시아 귀족과 상인들은 영국과 무역으로 큰 이익을 누려왔으나 갑작스러운 무역 금지는 러시아 경제를 짓누르고 루블을 평가절하하여 러시아의 부가 감소하였다. 알렉산더는 국민적 단합을 위하여 그들의 자유무역 요구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4) 나폴레옹은 1810년 오스트리아의 공주 마리 루이즈와 결혼하여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관계가 개선되었다. 발칸과 그들 동맹국은 알렉산더를 불안하게 하였고, 러시아는 과거 동맹국을 프랑스에 빼앗긴 셈이었다. (5) 올덴부르크의 조지 공작이 캐서린 파브로스나 - 알렉산더 여동생의 딸과 결혼하여, 조지 공작이 영국 상품에 대해 자국의 항구봉쇄를 거부하여 나폴레옹이 올덴부르크를 프랑스에 병합하였다. 알렉산더에게 이는 잊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6) 장 베르나도테는 나폴레옹이 임명한 프랑스 원수이다. 그는 1810년 8월 스웨덴 왕 찰스14 세로 선출되어 스웨덴 사람들은 그가 무역 제한을 풀고 러시아의 영토적 야심을 억제할 것이라 기대하였다. 나폴레옹은 그를 신뢰하지 않았으나 알렉산더는 프랑스가 러시아를 포위한다고 생각하였다. (7) 1808년과 1809년 흉년 이후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잉여 곡물과 네덜란드의 밀을 영국에 수출하도록 허용하였다. 알렉산더의 정책 고문들은 나폴레옹 자신도 무역 봉쇄를 지키지 않고 있는데 러시아만 무역장벽을 지키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 결과로 점점 많은 중립국 선박이 러시아 항구에 입항하였고, 알렉산더는 1810년 12월 말 대륙봉쇄 체제에서 공식적으로 탈퇴하였다. (8 ) 알렉산더는 우리는 충분한 공간과 잘 조직된 상비군을 준비하고 있다, 너희 프랑스 사람들은 용감하지만 오랜 고통과 험난한 기후로 저항심이 소진하였다, 우리들의 기후와 우리들의 겨울은 우리 편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1811년 프랑스 침공에 대비하여 러시아 전역에서 동원을 시작하였다.

프랑스의 러시아 침공: 나폴레옹은 사상 최대 685,000 병력을 동원하여 1812년 6월 레만 강을 건너 러시아로 진격하였다. 그는 알렉산더에게 압박을 가하여 영국과의 무역 중단을 희망하였다. 러시아군과 최초의 전투는 8월 스몰렌스크에서 프랑스군 17.5만과 러시아군 13만이 대치 중 실제 전투는 5만 대 3만 병력으로 양쪽 많은 사상자를 내었고 러시아군은 초토화 작전으로 도시를 불태우고 퇴각하였다. 9월 보로디노에서 프랑스군 13만은 러시아군 12만과 대전하여 양쪽 수만의 사상자를 내고 러시아군은 철수하였다. 1812년 9월 15일 나폴레옹은 모스크바에 입성하였으나 러시아군은 도시의 2/3 을 불태우고 퇴각하였다. 그는 알렉산더에게 평화의 서신을 2회나 보냈으나 회답이 없어 10월 19일 모스크바를 철수하여 11월 13일 스몰렌스크에 5만 병력으로 도착하였다. 요청한 식량과 피복은 코사크 습격과 지방 횡령으로 대부분 유실되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 추격부대와 싸우며 12월 5일 35,000 병력으로 스모르고니에 도착하여 지휘권을 뮈라에게 위임하고 바르샤바-드레스덴을 경유 18일 파리에 도착하였다. 한편 1813년 1월 뮈라는 코브노에서 지휘권을 이우게니에게 인계하고, 그는 잔여 병력과 함께 나폴리 왕국으로 돌아왔다. 나폴레옹은 모스크바 전역에서 570,000명을 상실하고 그중 370,000은 전사 병사하였고, 장군 48명 장교 3,000명을 포함하여 잔여 20만은 러시아군에 잡혀서 사라졌다. 러시아도 병력 150,000 이상을 잃었고 그 두 배 이상이 부상으로 불구가 되었다. 우선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은 스페인과 양면 전쟁을 하여 병력을 분산시키는 전략적 잘못을 범하였다. 또한, 군수지원에서 모스크바까지는 장거리이고 전진할수록 병참선이 길어져서 측방 노출로 방어병력이 증가하여 제1 전선의 병력이 감소하고, 러시아의 초토화 작전은 보급을 더욱 어렵게 하였다. 나폴레옹의 참모들은 러시아와 폴란드의 도로 능력, 곡물-사료의 가용성, 보급 수송속도 등을 부정확하게 평가하였다. 사실상 프랑스 병력은 주 전투가 있기 8주 전에 이미 절반으로 감소하였다. 또한, 러시아의 기후(여름의 더위와 겨울의 추위)는 전 지역에서 작전을 위협하였다. 나폴레옹이 모스크바에서 알렉산더에게 평화를 구걸하며 35일이나 체재하여 철수시간을 지체하고 병력을 혹한에 노출하여 막대한 손실을 가져왔다. 대군이 깊숙한 모스크바 진출은 전략적 오판이었다.

나폴레옹의 몰락: 나폴레옹 패퇴 후 프러시아, 스웨덴, 여타 독일 국가들은 러시아나 영국 등 반프랑스 편에 가담하였다. 나폴레옹은 그의 군대를 3만에서 시작하여 40만까지 신속히 재건하였다. 그는 1813년 5월 루첸과 바우첸의 동맹군과 전투에서 4만의 손실을 보았다. 이베리아에서 영국-포르투갈 및 스페인군이 연합하여 프랑스군을 피레네 밖으로 밀어냈다. 오스트리아까지 반프랑스 동맹에 가담하였다.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은 유럽 전역에서 180만 병력으로 프랑스의 약 90만 병력과 대치하였다. 1813년 10월 중순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36.5만 동맹군 대 19.5만 프랑스군과 전투에서 사상자 54,000대 73,000으로 동맹군이 대승하여 1814년 3월 파리에 입성하고 4월에 나폴레옹은 폐위되어 엘바섬으로 유배되고, 부르봉의 루이 18세가 복원되었다. 퐁텐블로 조약으로 비엔나 회의가 작동하였다.

비엔나 회의와 워털루: 비엔나 회의는 1814년 9월~1815년 6월 기간에 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영국의 주도로 여타의 대표들과 함께 가진 회합이며, 그 목적은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발생한 중요한 이슈를 조정하여 유럽의 장기적 평화계획을 준비하는 데 있었다. 그 목표는 옛 국경을 회복하고 주요 강국의 영토를 조정하여 세력균형으로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지도자들은 유럽의 현상 유지를 바꾸는 공화주의나 혁명을 수용하지 않는 보수주의자들이었다. 프랑스는 정복한 영토를 모두 상실하였고 프러시아는 독일 서부 소국, 스위스 포메라니아, 작센의 60%를 얻었다. 오스트리아는 베네치아와 대부분의 북부 이탈리아를 가졌다. 러시아는 폴란드 일부를 가졌다. 네덜란드 왕국이 새로 창립되었다. 1815년 3월 20일 나폴레옹이 엘바섬에서 탈출하여 돌아와 내각을 구성하고 군대를 편성하며 이원제로 구성된 왕국의 헌법을 초안케 하였다. 유럽의 강국들은 경악하여 제7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고 웰링턴 장군의 지휘하에 6월 18일 워털루에서 동맹군 11.8만이 나폴레옹 7.3만 병력과 결전하여 승리하였다. 나폴레옹의 백일천하가 끝나고 그는 폐위되어 세인트 헬레나에 유배되었다. 1815년 11월 제2 파리조약으로 프랑스는 추가적 영토를 양도하고 7억 프랑의 배상금과 3~5년의 동맹군 주둔 비용을 부담하였다. 또한, 알렉산더의 제의로 5일 후 4강은 파리에서 신성동맹을 결성하여, 유럽은 새로운 정치체제로 진입하게 되었다.

나폴레옹의 유산: 나폴레옹은 지혜롭고, 포용하며 활력이 넘쳤고 구질서를 대치하여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매사에 자신감이 넘쳤다. 그가 전장에 나타나면 40,000 병사를 더 하는 가치가 있었다고 웰링턴이 말하였다. [정치] 그는 내부의 혼돈과 외부의 위협을 제거하고 재산권과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여 법과 질서를 회복하고 프랑스혁명을 끝냈다. 비엔나 회의는 유럽은 구체제로 환원하여 세력균형으로 평화를 가져왔으며 프러시아가 영토를 확장하고, 영국이 해군력을 강화하였다. [사상] 유럽은 프랑스의 정복으로 인해 인명과 재산이 전쟁에 동원되어, 정치적 자주권의 상실로 프랑스 정복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애국심과 국가주의(민족주의)를 불러왔다. 한편 프랑스 국민은 새로운 국가에 의한 징병제로 국민의 군대를 창설하여 자부심으로 국가에 충성하는 국가주의가 출현하였다. 나폴레옹 전쟁은 자유주의를 전파하면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약화해 그들 식민지에서 민족주의의 봉기가 독립을 유도하였다. [경제] 나폴레옹은 트라팔가르 해전 실패로 영국 상품에 대한 대륙봉쇄체제를 확립하였고, 이베리아반도를 침공하여 영국의 접근을 봉쇄하려 하였다. 경제행위를 정치 군사적 힘으로 제재하면 단기적으로 가능하나, 장기적으로 경제적 침체를 가져오기 때문에 러시아의 경우 귀족과 상인들이 정치세력을 압박하여 금수 조치를 해제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러시아와 전쟁까지 불사하여 정권의 몰락을 자초하였다. [군사] 나폴레옹은 군사체제를 발전시키고 군사정보를 잘 활용하였으며, 군대의 규모가 커지고 정신 무장이 강화되었다. 그의 전략적 잘못은 스페인을 침공하여 게릴라전 저항으로 국력을 소모하였다. 러시아 원정은 양면 전쟁으로 군사력을 분산하였다. 모스크바까지 깊은 종심으로 지형, 기후, 자원, 수송속도 등으로 인한 군수지원 문제를 경시하였다. 특히 모스크바에서 35일간 지체로 혹한기 철수 작전에 막대한 피해를 초래하였다. [사회] 나폴레옹은 바른 원칙을 가진 정부가 프랑스 혁명정신에 입각한 법(Civil Code)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확신하고 개인의 자유, 기회의 평등, 성과주의, 이상에 합당한 통치, 종교의 자유, 현대적 공교육, 화폐와 도량형의 표준화 등을 추구하였다. 또한, 합리적인 지방행정, 시골의 약탈 금지, 과학과 예술의 중흥, 봉건제도의 폐지, 교회 재산의 몰수 및 재분배 등을 실천하였다. 중세 길드를 폐지하고, 농노를 해방하며, 노동자들의 자유로운 이주를 허용하였다.

TO BE CONTINUED
(f) 유럽의 종교와 정치 (1648-1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