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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연재 14-겨속4/재미 학자 Hugo W. Kim

양곡(陽谷) 2023. 7. 11. 20:21

문명사 연재 14. 근세초기 유럽(1400-1715)의 경제사상 (Continued 4)

(e) 과학혁명과 지적발전

르네상스의 결실로서 천문학 의학 수학 등의 분야에서 새로운 지식과 가장 창의적인 학자들의 저술 즉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1543),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의 인간 육체의 섬유질(1543), 지롤라모 카르다노의 수학 법칙(1545)이 출간되었다. 천문학에서 과학의 진전은 유럽인들이 천동설로부터 지동설로 우주를 보는 새로운 방법을 알게 하였고, 인간 육체를 해부하는 의학의 발전은 질병의 새로운 치료법에 눈을 열어주었고, 기하학을 포함하는 수학은 항해술, 군사과학, 지리학의 열쇠로 자연을 이해하는 기초가 되었다. 과학적인 방법은 영국의 베이컨과 같은 경험주의자와 프랑스의 데카르트 같은 합리주의자에 의하여 설계되었다. 과학발전의 동기는 기존 과학지식과 관측된 현상이 상이하여 이를 해결하려는 개인적 동기가 중요하였다.

과학혁명의 진원은 (1) 르네상스 인본주의자들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연구가 새로운 과학을 향한 욕구를 갖도록 자극하였다. (2) 종교개혁에서 가톨릭교의 계급적 권위에 대치하여 개신교는 모든 분야에서 사상의 자유를 가지며 자유로운 의문을 갖도록 허용하며 과학과 종교가 협력하였다. (3) 중세 과학 지식은 과학혁명의 기초가 되었다. 수학은 방법론을 발전시켰고 지구의 운동이나 중력을 측정하는 수단이 되었다. (4) 새로운 육지의 탐험이나 발견의 욕구는 항해술, 조선술, 지도 제작술 발전을 자극하였다. (5) 기술적 문제는 새로운 도구나 기계의 발명에 대한 욕구를 자극하여 새로운 발명을 가져왔다. 이탈리아 전쟁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전쟁기구를 고안하였고, 알브레히트 둘러는 도시의 축성을 설계하였다. (6)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는 1445년 새로운 인쇄기를 발명 개선하여, 1500년에 1,000대의 인쇄기가 유럽 전역에 설치되었고, 베네치아는 100대로 인쇄 산업의 중심이 되었다. 과학의 발전 분야는 천문학(Brahe, Kepller, Galilei, Newton), 의학, 수학, 연구방법을 포함하며, 17세기에 발명한 과학적 주요기구 가운데 현미경, 망원경(1608), 공기펌프(1650), 시계추(1637), 기압계(1643), 온도계 등이 있다.

교육 분야: 르네상스 시대: 초등교육은 부모가 지급하며, 자영하는 학교장이 가르쳤다. 피에트로 버게리오(1370-1444)는 인본주의 교육이론을 개발하였고, 그는 저술(On Noble Customs and Liberal Studies, 1401)에서 자유로운 연구는 자유로운 사람이 덕성과 지혜를 가지도록 돕는다; 역사는 우리에게 덕성과 악이 가져오는 예로서 청년들이 따라야 할 모형을 보여준다; 도덕철학은 인생에서 더욱 좋은 결정을 위해 사물의 진리를 배우도록 돕는다; 웅변술은 남을 설득하는 정치적 서비스에 필요한 기술이다; 전쟁은 육체적 인내와 군사적 기술이 필요하여 무장과 함께 이성과 육체의 단련이 필수적이다고 하였다. 비토리노 다 펠트레(1378-1446)는 최초의 현대식 학교 교장으로 기숙학교를 세웠고 만투아에서 유력가정의 자녀들을 기숙학교에서 교육하였다.

종교개혁 시대에 갑작스러운 수도원의 폐쇄로, 군주나 제후들이 정치 군사 종교의 복잡한 여건으로, 교육이 경시되었다. (1) 루터와 멜란히톤의 요청으로 국가가 초등학교 설립하여 무료로 의무 교육을 시행하였다. 1600년 독일은 300개의 초등학교를 설립하였다. (2) 영국의 학교는 종교적 변화로 독일보다 공교육이 더 늦어졌다. 1548년 졸업생 숫자로 옥스퍼드 문학사 173명이며 케임브리지 191명이었으나 1547년과 1550명은 한 명도 없었다. 왕실 위원회가 이를 개선하였다. (3) 가톨릭의 프랑스와 플랑드르는 대학에 큰 변동이 없었으나 활력과 지적 자유가 감소하였다. 파리대학은 학생 6,000명의 큰 대학이었으나 전처럼 외국 학생들을 유치하지 못하였다. (4) 스페인은 14개의 우수한 대학에서 70명 교수가 6,778명의 학생을 가르쳤다 (1584). 이탈리아의 대학은 계속 번창하였다. (5) 예수회 학교는 국가, 교회, 재산가들이 창립하고 예수회가 통제하였다.

17세기 교육: 지식은 학교 도서관 발간물을 통하여 전파되었다. 1711년 영국의 일간 주간 신문은 44,000부가 발행되었고, 잡지가 발행되어 학자 과학자 지식인들의 국제적 매체가 되었다. 도서출판이 증가하여 1701년에 파리에 178 서점이 있었으며, 그들 중 36개는 인쇄와 출판을 겸하였다. 교육은 프랑스의 종교전쟁, 영국의 내전, 독일의 30년 전쟁으로부터 상실한 것을 되찾으려고 노력하였다. 17세기 초등교육은 남녀 모두 의무 교육이 되었고, 영국은 사립 교육 발전으로 1876년에 시행되었다. 프랑스의 초등교육은 교구에서 하였고, 중등교육은 예수회가 담당하였다.

천문학 분야: 프톨레미(100-175)의 알마게스트는 천 년 이상 천문학의 표준이 되어왔으나, 천동설의 기하학적 오류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다. 폴란드 태생인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1473 -1543)는 그의 저술 (On the Revolution of the Heavenly Spheres)을 1530년에 완성하고 1543년 그가 사망하기 직전에 출간하여, 지동설의 천문학 이론을 제시하였다. 우주와 지구는 구형이며, 이들의 천체 운동은 불변하고 원형이며 영원하다. 천구의 순서는 고정된 태양,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고정된 별들이다. 모두 6개의 행성은 태양의 주위를 다른 시간 간격으로 회전한다. 코페르니쿠스는 지구의 3 동작을 가정하였다. (1) 지구는 축을 서에서 동으로 일정 시간 자전하여 밤과 낮이 된다. 2)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서에서 동으로 회전하여 여름과 겨울이 온다. 3) 일 년 중 태양의 주위를 돌 때 같은 경사의 축을 유지한다.

타이코 브라헤(1546-1601)는 코페르니쿠스 지동설의 기하학적 장점과 프톨레미 천동설의 철학적 장점을 결합하여 태양이 지구 둘레를 도는 동시에 다른 행성들이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수정된 천동설을 주장하였다. 요하네스 케플러(1571-1630)는 3 법칙을 만들었다. (1) 타원 궤도의 법칙: 행성은 태양을 한 초점으로 하는 타원 궤도를 그리면서 공전한다. (2) 면적 속도 일정 법칙: 행성과 태양을 연결하는 가상적인 선분이 같은 시간 동안 쓸고 지나가는 면적은 행성과 태양 사이 거리와 관계없이 항상 같다. 3) 태양으로부터 행성까지의 거리가 d 이고, 태양으로부터 그 궤도의 기간이 t 이면, 모든 행성에 대한 d3/t2 는 같다.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는 1610년까지 파두어대학에서 속도와 가속도, 중력과 자유 낙하, 상대성 원리, 관성, 은하수, 유체정역학 등을 연구하였다. 그는 온도측정기와 군사용 나침판을 발명하였고, 천체관측을 위해 망원경을 사용하였다. 천문학적 관측에 관한 그의 공헌은 금성 위성을 망원경 관측으로 확인, 목성의 4개 위성의 관측, 토성의 둥근 테두리 관측, 태양의 흑점 분석 등이다.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로 1615년 종교 재판을 위한 조사를 받아 지동설을 부인하였다. 그러나 그의 저술 (Dialogue Concerning the Two Chief World Systems, 1632) 출판으로 교황 우르바노 8세에 의해 이단으로 종교 재판을 받아 가택연금으로 여생을 보내면서 저술(Two New Science, 1638)을 출간하였다.

아이작 뉴턴(1642-1727)은 영국의 수학자 물리학자 천체학자로 그의 저술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Mathematical Principles, 1687)는 세 권으로 되어있으며 1권은 마찰과 저항이 없는 이상적 조건에서 작동하는 물체의 운동, 2권은 저항으로 상실한 물체의 운동, 3권은 행성, 유성, 달과 바다의 운동을 기술하였다. 뉴턴의 제1 법칙은 관성의 법칙으로 “물체의 질량 중심은 외부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일정한 속도로 움직인다.” 제2 법칙은 가속도 법칙으로 “물체 운동량의 시간에 따른 변화율은 그 물체에 작용하는 힘과 (크기와 방향에 있어서) 같다.” 제3 법칙은 작용과 반작용 법칙이다. 뉴턴의 운동 법칙과 우주의 중력은 상대성 이론이 나올 때까지 지배적 견해였다. 그는 시력학(1704)을 출간하고, 라이프니츠와 연관 없이 미적분학을 발전시켰다.

의학의 발전: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460-377 BC)와 로마의 갈렌(129- 216)은 의술에서 전설적인 사람들이다. 아게지나의 폴(625-690)은 의학 백과(Medical Compendium in Seven Books)를 저술하여 비잔틴 의술을 정리하였다. 페르시아의 이븐시나(980-1037) 저술(Healing and The Canon of Medicine)이 중세 대학의 표준교재로 17세기까지 사용되었다. 살레르노의 로게리우스(1140-95)는 저술(The Practice of Surgery, 1180)에서 해부학의 실제를 기술하여 대학에서 교재로 사용하였다. 13세기에 몬트필리어, 파도바, 볼로나 대학이 의학을 선도하여 유럽에 많은 의과 대학이 설립되었다. 흑사병이 이후 의학 교육이 활성화되었다. 16세기 말 네덜란드에서 현미경을 발명하여 해부학에 이바지하였다.

파라셀서스(1493-1541)는 바셀과 페라라대학에서 수학하고 의사가 되었다. 그는 외부물질의 공격으로부터 질병이 발생한다고 보고, 인체의 질병은 화학적 치료제를 복용하여 신체내의 무기물 균형을 맞추어 줌으로써 치유할 수 있다 하였다. 안드리아  베살리우스(1514-64)는 파도바대학에서 의학을 배우고, 1534년 군의관으로 종군하여 인체 해부를 체험하였고, 대학에 돌아와 교수 연구를 바탕으로 저술(On the Fabric of the Human Body, 1543)을 출간하였다. 그는 왕실 어의로 봉직중 해상사고로 사망하였다. 윌리엄 하비(1578-1657)는 캠브리지를 졸업하고 파두바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 후 영국에 돌아와 의사가 되었다. 1607년 성 바르톨로메 병원 주임 의사로 와서 생애 동안 봉직하였다. 그의 저술 (On the Motion of the Heart and Blood in Animals, 1628)은 순환체계의 실험적 방법과 순환적 과정을 설명한다. 그는 동물의 번식에 관하여 저술 (On Animal Reproduction, 1651)을 하였다.

현대 화학: 파라셀서스는 새로운 의학의 네 기둥은 보이지 않는 자연의 지식으로 철학, 별들의 인체에 대한 영향으로 천문학, 질병에서 오는 신체의 불균형을 잡는 알케미, 의사의 덕성과 정직성으로서 윤리학이라고 하였다. 의학과 화학의 밀접한 관계에서 의학적 화학이 출현하였고 알케미가 무기물의 추출과 분석 도구로서 유용하였다. 로버트 보일(1627-91)은 아일랜드 태생으로 화학을 의학에서 분리하여 독립된 학문으로 만들었으며, 스콜라 학파의 자연철학을 배척하고 실험적 사실을 중시하여 실험을 바탕으로 하는 근대 화학의 기초를 이루었다. 그는 특별 화학자(The Sceptical Chymist, 1661) 에서 소금, 유황, 수은은 물체의 참 원리가 될 수 없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1662년 “온도가 같으면 기체의 체적은 압력에 반비례한다는 보일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또한, 소리는 공기가 없으면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도 발견하였다.

과학혁명과 사회: 과학의 발전으로 과학자들의 자율적인 모임인 협회가 출현하였다. 피렌체에는 갈릴레오 학생들이 실험의 학회를 만들었다. 영국의 왕립 사회, 프랑스의 왕립 과학협회, 베를린에 과학 학회가 출현하였다. 베르나르드 데 폰테넬레(1657-1715)는 그의 저술(Conversation of the Plurality of the Worlds, 1686)에서 과학의 발전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 언급하였다. (1) 과학은 전문가의 독점물을 벗어나 독자들에 의하여 문학과 함께 일반화되었다. (2) 교리적 논쟁, 종교적 불관용, 종교전쟁 등으로 인해 과학의 발전과 함께 종교적 회의주의가 증가하였다. (3) 17세기에 여행자, 전도자, 의사, 항해사들이 다양한 분야의 책을 발간하고 유럽인을 교육하여 그들이 다른 문화에 익숙해졌다. (4) 존 로크의 자유주의 사상과 뉴턴의 과학체계는 서구 문명을 고양했다. 한편 갈릴레오의 지동설과 데카르트의 이원주의는 기도교리와 달랐다. 뉴턴은 실험적 결과를 수학적으로 증명하여 경험주의와 합리주의를 통합하였다.

존 코메니우스(1592-1670)는 보헤미아 태생으로 저술(The Labyrinth of the World and the Paradise of the Heart, 1631)에서 교회 안에서 신과 개인 관계가 사회로 연결되고, 다른 신교들과의 단합이 평화를 가져온다고 하였다. 블레즈 파스칼(1623-62)은 수학, 과학, 철학자로 프랑스의 요절한 천재이다. 파스칼의 원리는 “밀폐 용기 내부의 움직이지 않는 유체의 일부에 압력을 가하면 그 압력이 유체 내의 모든 곳에 같은 크기로 전달된다”는 것이다. 그는 편지 모음(The Provincial Letters, 1670)은 신 없는 인간의 불행, 이성의 인간주도, 신의 주도로 구성하였다. 프랑스의 피레 베일 (1647-1706)은 철학자로 저술에서 종교와 도덕은 꼭 연관될 필요가 없고 개인은 양심에 따라 신앙을 정해야 하며, 한 국가에 단일 종교보다 다수 종교가 유익하므로 종교적 완전한 관용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의 저술(Historical and Critical Dictionary, 1697)은 백과사전의 전조로 간주하였다.

(문명사 연재 14. 근세초기 유럽의 경제사상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