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현대시사 속에서의 의미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정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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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의 뒷모습〉
― 한국 현대시사 속에서의 의미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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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문학사적 맥락 속의 석양
한국 현대시는 늘 변화의 물결 속에 있었다. 해방과 전쟁, 산업화와 민주화, 그리고 오늘의 디지털 시대까지, 시는 그 흐름을 따라가기도 하고, 때로는 거슬러 서 있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세대별 시인들은 각기 다른 언어의 풍경을 남겼다. 1970년대 이후 한국 시단을 지탱해 온 중견·원로 시인들은 오랜 문학적 체험과 시대의 굴곡을 몸에 새겼다. 〈석양의 뒷모습〉은 바로 그 문학사적 흐름 속에서 읽어야 할 시집이다.
조병기, 허형만, 임병호, 정순영. 이 네 시인은 각기 다른 시적 궤적을 걸어왔지만, 모두가 반세기 이상 한국 시의 한 부분을 써온 주체들이다. 그들이 나이 여든을 넘겨 한 자리에 모여 낸 이 시집은 단순한 합동 시집이 아니라, 세월을 건너온 한국 현대시의 ‘구술사’이자 ‘서정사’라 할 수 있다.
□ 조병기 시인
― 자연 서정의 맥을 잇다
조병기의 시는 1970년대 시조문학 전통 속에서 뿌리를 내렸다. 그는 늘 자연을 곁에 두었고, 그 자연을 통해 인간 내면의 조율을 시도했다. 그의 시편에서 우리는 조지훈이나 박목월이 남긴 자연 서정의 계보를 잇는 맥락을 읽는다. 그러나 조병기의 언어는 단순한 전통의 모방이 아니다. “귀뚜라미가 빈방에 풀어 놓은 가을” 같은 구절은 한국적 서정의 단아함 속에서도, 현대인의 고독한 내면에 다가가는 새로운 울림을 가진다.
문학사적으로 볼 때, 그는 자연 서정을 현대적 감각으로 변주한 시인이다. 그 덕에 그의 작품은 지나간 시대의 향수를 넘어 오늘의 독자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 허형만 시인
― 생활 서정의 확장
허형만의 시 세계는 한국 현대시에서 “생활 서정”을 확장시킨 중요한 사례로 평가된다. 그는 시적 소재를 하늘이나 이상향에서 찾지 않고, 늘 생활의 바닥, 노동의 현장에서 건져 올렸다. 세탁소, 택배, 지팡이 같은 사소한 사물들이 그의 시 속에서 존엄한 빛을 얻는다.
1970년대 이후 한국 시가 모더니즘과 민중시, 현실참여시 등으로 갈라질 때, 허형만은 “생활의 자리”를 붙들었다. 그것은 거대한 이념의 언어 대신, 사람들의 일상과 노동을 시로 옮기는 길이었다. 문학사적으로 그는 생활시학의 새로운 문법을 제시했고, 이는 한국 현대시의 저변을 넓힌 기여로 남는다.
□ 임병호
― 노년의 시학과 감각의 전환
임병호의 시는 한국 현대시사에서 “노년의 시학”이라는 주제를 본격적으로 보여주는 귀한 기록이다. 그가 말하는 “노년의 귀, 노년의 눈”은 단순히 육체적 감각의 쇠퇴가 아니라, 세월을 거쳐 새롭게 열린 감각이다. 이는 김현승 이후의 내면적 서정 전통과도 맞닿아 있으면서, 노년의 자기 성찰을 한국적 정서 속에서 풀어낸 특징을 지닌다.
그의 시는 노년을 결핍의 시간이 아니라 충만의 시기로 전환한다. 한국 시사에서 이는 매우 의미 있는 지점이다. 전통적으로 노년은 쇠락의 은유로 쓰였으나, 임병호는 그 반대의 의미를 열어 보인다.
□ 정순영
― 영성시학과 초월의 언어
정순영의 시 세계는 종교적 성찰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단순한 신앙 고백이 아니라 인간적 사랑과 그리움으로 확장된다. 그의 시는 종교와 가족, 인간적 삶을 가로지르는 영성의 언어다.
문학사적으로 그는 한국 시에서 종교적 언어를 현대적 서정으로 전환한 사례로 평가된다. 김현승이 보여주었던 기독교적 서정, 고은이 보여준 불교적 우주관을 잇되, 정순영은 그것을 자신의 삶과 가족의 이야기로 연결해 더욱 친밀한 차원의 영성으로 빚어낸다.
□ 합동 시집의 의의
― 네 목소리의 합창
〈석양의 뒷모습〉은 단일한 시인의 성취가 아니라, 네 명의 시인이 모여 이룬 합창이다. 그러나 이 합창은 단순한 병렬이 아니다. 각기 다른 목소리가 모여 하나의 화음을 이루고, 그 화음 속에서 한국 현대시의 흐름이 응축된다.
조병기의 자연, 허형만의 생활, 임병호의 노년, 정순영의 영성. 네 축은 서로 다르지만, 석양이라는 공통의 자리에서 조우한다. 그것은 생애의 황혼이자, 시적 성숙의 시점이다. 이 합동 시집은 한 세대의 시인들이 자신의 언어로 써 내려간 ‘시적 석양’의 기록이다.
□ 맺음말
― 석양의 빛은 언어의 유산
〈석양의 뒷모습〉은 한국 현대시사의 소중한 기록이다. 그것은 네 명의 원로 시인이 자신의 삶과 시를 응축하여 남긴 언어의 유산이며, 동시에 후대에게 건네는 문학적 유언이다.
석양은 저물어가는 빛이지만, 그 빛은 하루를 가장 아름답게 물들이는 순간이기도 하다. 네 시인의 언어가 남긴 울림은 바로 그 석양의 빛과 닮아 있다. 화려하지 않으나 오래 남는 빛, 사라지면서도 더욱 깊어지는 빛.
한국 현대시는 이 빛을 이어받아 새로운 세대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석양의 뒷모습〉은 단순한 시집이 아니라, 세월을 견딘 언어가 남긴 문학적 잔광이자, 한국 시사 속에서 영원히 기억될 석양의 기록이다.
ㅡ 청람 김왕식